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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Apr 08. 2024

이번엔, 중년을 읽습니다

17. 스타벅스 일기 : 권남희

일본인 지인에게
"요즘 저 스타벅스에서 일해요."하고 자랑했다.
그랬더니 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권상, 컵이나 접시 깨뜨려서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아... 그 일이 아닙니다만...     
권남희 <스타벅스 일기> 2024, 한겨레출판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 첫 장부터 이렇게 재미지다니. 나는 지하철 안에서 큭큭 소리 내서 웃으며 생각했다.

'아, 이 언니. 만나서 수다 떨고 싶네.'

(나중에 책 속에서, 작가님이 극 I라는 것을 알게 됐다. 수다랑 어울리는 분은 아닌 것으로...)


번역가 권남희 작가님은 내게 유명인이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책 <밤의 피크닉>, <배를 엮다>, <무라카미 라디오> 등을 번역하셨고, 마니아층이 있는 에세이 작가다. 나는 작가님의 책 <혼자여서 좋은 직업>을 '읽고 싶다, 읽고 싶다.' 생각만 하고 아직 읽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광화문 스타벅스에 가니, 권남희 작가님의 <스타벅스 일기>가 특별전처럼 중앙매대에 펼쳐져 있었다. 그때도 '읽고 싶다, 읽고 싶다.' 생각만 하며 바삐 지나갔다.


드디어 책을 펼친 날은, 지하철 안이었다. 햇살이 적당히 따뜻했고 주말 낮이어서 사람도 별로 없었다. 한참을 읽다가 올려다보니, 벌써 내가 내릴 역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저기 인덱스를 붙이고 싶은데 마침 가방에 인덱스가 없었고, 나는 몇 번이나 책장을 접어 표시하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 했다(그래도 표시는 하고 싶어서 결국 카카오톡에 해당 페이지를 메모했다).


작가는 매일 스타벅스로 출근해, 스타벅스의 메뉴를 섭렵하며, 스타벅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며, 자신의 일인 번역을 한다. 작가님은 50대이고 딸은 20대이고 친정어머니는 80대이다. 중년이다. 노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중년. 책 속에 자주 나오는 작가님의 딸 이름은 '정하'인데, 95년생이고 회사원이다. 책을 한 권 읽는 동안 반복해서 들었더니, 나는 이제 '정하'가 아는 언니 딸 같다. 작가님은 빈둥지증후군을 벗어나고자 스타벅스로 출근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나에게도 곧 올 '빈 둥지증후군'.

아니, 이미 와 버렸을 수도.


와상 환자인 엄마는 치매가 심해져서 화장실 간다고 내려오려고 하고 92세 할머니는 연신 언니(나)를 불러댄다. 두 할머니 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엄마는 나한테 "저 사람이 아줌마 엄마라요?"하고 묻는다.
이 무슨 족보 브레이커인가. (67쪽)


곳곳에서 킬링 포인트가 발견된다. 문체는 경쾌한데, 곳곳에 인덱스가 붙는다. 이런 책은 사야 한다. 사서 가져야 한다. 꼭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이 이렇다. 책 머피의 법칙. 산 책은 첫 장 보고 덮게 되고, 빌린 책은 밑줄이 긋고 싶어 안달이 나고.


몸도 정신도 피폐해져서 집으로 오는 길에 스타벅스에 갔다.
그리고 불쌍한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초콜릿 크림 프라푸치노를 주문했다.
당 따위, 나트륨 따위, 마음 힘들 때 쉴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안도할 따름. (67쪽)


봄, 여름, 가을, 겨울. 1년 간 작가님이 스타벅스에 출근한 기록이다 보니, 작가님의 일상이 드러난다. 나이 많은 어머니를 간병해야 해서 병원과 스타벅스를 오고 가는 일상. 어우, 고단하셨겠다. 그럴 때 역시, 우리를 변함없이 위로하는 것은 당과 커피다.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는 팍팍했던 지난겨울. 자동차 시동을 걸자마자 부드러운 기계음이 말했다. '도로가 결빙되었으니 주의 운전하세요.' 추운 겨울, 아직 어두운 집을 나서며 자고 있는 아이를 위해 밥을 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어두운 새벽 나를 염려해 주는 말소리. 이런, AI에게 위로받다니. 그런 날은 나도, 스타벅스로 향해 평소와 다르게 달콤한 라떼를 마셨다.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추운 겨울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정말, 정말이지 순식간에, 내 마음 따위는 달래진다.


<스타벅스 일기>를 읽으며 먹어 보고 싶은 스벅 메뉴가 정말 많이 리스트업 됐다. 일단은 권남희 작가님이 애정하는 녹차, 그리고 우리 쑥 크림 프라푸치노 위드 콜드브루, 호두 블랙티 라떼, 오텀 로드 애플 블랙티... 메뉴명이 너무 어렵다. 외울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메뉴명을 읽으면 읽을수록 맛에 대한 상상이 풍부해지고 먹고 싶어 진다는 것이다.


신메뉴 음료 설명 쓰시는 분은 나노 단위로 촘촘하고 섬세한 절대 미각을 가졌거나,
시인이 되고 싶었던 사기꾼(?)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어떤 음료나 음식을 먹어도 '맛있다' '맛없다' 이상은 표현하지 못하겠던데 어쩜 이렇게 근사한 묘사를 하실까. (76쪽)


역시 그런 거였어. 스타벅스 프로모션팀 직원들은 시인이 되고 싶었던 사기꾼이었던 걸로.


책 속에 작가님의 어머니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치매에 걸리셨고, 나이는 아마도 80대 후반이시고, 병원에 계시다. 작가님은 종종 어머니를 간병하러 병원에 간다. 나는 소설보다 에세이를 많이 읽는데, 중년의 작가들은 모두 노부모를 간병하느라 마음이 아프고 몸이 아프다. 중년의 작가들은 결혼을 한 사람도 있고 안 한 사람도 있다. 아이가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다. 다 다르다. 하지만 모두, 노부모가 있다. 늙은 부모. 그래서 마음이 아프고, 간병해야 해서 본인들의 몸이 아프다.


이번 주말에는 작가님이 '민트 초코칩 블렌디드'를 마시면서 번역하셨다는 일본 소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읽어야겠다. 정말, 최고의 선택일 같은 예감이 든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작가님의 에세이를 섭렵해야지. 일단 <혼자여서 좋은 직업>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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