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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천천히 빛나는 사람이에요.

by Agnes


'서서히'라는 부사를 가르치던 중이었다.


'서서히'는 한자다. '徐徐히'. 그래서 '서서히'의 뜻은 도리없이 천천히, 느린, 급하지 않은, 그런 뜻이다. 천천하고 천천하다. 그리고 거기에 '히'가 붙는다. 내 이름은 서민선이다. 徐민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고급 학생들이고 상당수의 아시아 학생이 섞여 있기 때문에 이 단어는 한자와 한글의 조합이다, 그리고 이 '서'는 '천천히'라는 뜻이다,라고 말하면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게다가 이 서는 선생님 이름에도 들어 있는 그 '서'란다. 그리고 칠판에 써 줬다.


徐徐히


이틀 뒤 방학을 앞둔 학생들은 간신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날도 더운데 꾸역꾸역 버티는 중이라면서 단체로 뭐 신나는 것 없나, 뭐 말 거들 거 없나, 뭐 딴 길로 샐 거 없나, 그런 궁리만 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여지없이, 이번 학기 장난꾸러기 학생이 묻는다.


그럼 민은 무슨 민이에요?


옥돌 민이에요. 귀하고 빛난다는 뜻이죠. 그럼 선은 뭐예요? 착할 선이요. 그럼 선생님은!


그럼 선생님은, 천천히 빛나는 사람이네요.


우와! 이것은 악담인가요, 덕담인가요. 농담인가요, 진담인가요. 선생님은 나이가 꽤 많고, 늦은 나이에 작가가 되었으니 덕담으로 하죠. 내가 얼마나 기쁘게 웃었던가. 얼마나 신나서 대답하고 말을 나눴던가. 학생들은 내 마음을 알까. 그저 徐 선생님은 역시 맞장구의 귀재라고만 생각할까.


요즘 나는 내가 매우 마음에 안 든다. 날은 덥고, 예리하고 수준 높은 한국어 고급 학생들은 버겁고, 스스로를 늙고 지쳤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나는, 아마도 더위를 먹은 것 같다. 나는 여름이 제일 힘들다. 홍삼도 비타민도 그 어떤 건강식품도 즐기지 않는 나는, 맥주 말고 어떤 음식이 이 더위를 넘겨줄 수 있을까 찾고 찾는데 못 찾고 있다.


하지만 나는 학생에게 인정받은 '천천히 빛나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리고 참, 나는 얼마 전에도 내 베이스캠프 책방지기님께 '천천히 조용히 다 해'라는 호를 받지 않았는가. 그러니 나는, 천천히 여름을 제대로 겪는 중인 걸로 해 두자. 천천히 해내겠지. 천천히 겪어 내겠지. 천천히 괜찮아지겠지.


무려, 이름에 쓰여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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