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현실에서 부재가 가져오는 장점

by 김현이

11. 현실에서 부족함들이 가져오는 장점 - , 내면의 힘을 키울 수 있다는 것


2019. 09. 03.


어릴 때 반에 전학을 온 친구가 있었다. 몸집에 비해 커다란 머리를 가진 남자애, 도시에서 왔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 것인지 얼굴과 살갗은 희고 오자마자 공부도 가장 잘하는 축으로 들었다. 사실 키는 작았지만 행동의 조심성이나 학교생활, 그리고 성적 등 그 아이를 평가할 만한 몇 가지 객관적 기준에서 보자면 매우 인기 있는 아이가 될 만했고 사실 당시 우리 반 여자애들뿐 아니라 다른 반 아이들까지도 그 아이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단연 최고의 인기 순위에 올라 있었다. 그런데 솔직히 순순히 외모로 치자면 깡마른 몸에 머리만 커서 그런지 꼭 외계인 E.T와 닮았고 얼마나 잘난 척을 했던지 정말로 내게는 재수 없는 아이로만 여겨졌다. 그런데 그 아이에게는 선생님들까지도 모두 다 친절하게 대해주셨고 모든 것들이 그 아이 중심으로 흘러간다고 느꼈을 무렵 나는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중학생이던 오빠의 담임 선생님이 바로 그 아이 아빠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평범한 가정주부였고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던 여동생이 있었는데 외모가 꼭 그 아이와 같아서 흰 얼굴에 비해 예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난 뒤 그 애가 친한 친구 몇몇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뭔가 자존심이 상해서 중학교 근처에 있는 학교 관사로 우르르 몰려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던 내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는 것으로 보아 그 초대를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던 친구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 같다. 마치 그 아이의 쫄짜라도 되겠다는 아이들처럼 보였으니까.


그날 이후, 내가 빠진, 그 아이를 둘러싼 무리가 형성되었는데 나를 가장 실망하게 했던 사실은 그 외계인 E.T가 내 가장 친한 친구를 좋아한다는 소문이었다. 솔직히 공부만 잘했지 내 눈엔 전혀 멋지지 않았었는데 어느 날 당시 반장이던 오빠가 담임 선생님과 함께 학교 앞 문구점에 가는 것을 우리 학교 담장 너머로 본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이던 그 애의 아빠는 완전히 외계인과는 딴판이라는 것을 보고 왠지 그 외계인에게 동정심이 들었던 것을 말하고 싶다. 그 애와 동생은 외모가 좀 그런 하지만 뭔가 사모님처럼 거드름피우던 엄마를 닮았다고 생각했고 왠지 그 집에서는 오빠네 선생님만이 외톨이가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상상까지 했던 것이다. 오빠가 고등학교를 진학 할 무렵, 살림이 어려워도 꼭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시켜야 한다고 우리 부모님을 설득하시려고 집까지 찾아오셨던 선생님을 보았을 때 외계인 친구에게 심술을 부렸던 내 마음속에 왠지 모를 미안함이 생겼고 그 이듬해 오빠는 도시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그 친구는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갔다. 선생님이 전근을 가신 거라고 했다.


지나고 보니, 당시 나는 어쩌면 그 외계인과 정말로 친해지고 싶었지만, 왠지 못생긴 녀석이 잘난 척만 한다고 그래서 무조건 재수 없는 아이라고만 여기면서 나 스스로 일부러 부정적인 생각을 했었고 또 무엇보다 내가 아닌 나보다 공부도 못하고 키도 작았던 내 친구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자존심이 상했던 이유로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지 못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들은 소식은 여전히 공부를 잘했던지 서울대에 갔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들었을 때조차도 ‘역시 머리가 크니까 공부는 쭉 잘했던 모양이야. 그리고 엄마 치맛바람이 오죽했겠어.’ 하던 냉소였다. 이제와 생각해보건대, 아무래도 내 깊은 마음속의 부러움을 그렇게 삐뚤어진 형태로 표출한 것이라고 여긴다. 제 아빠 반의 반장이 바로 우리 오빠인데 왜 저 녀석은 나와는 친해지려고 들지 않았던 것일까. 왜 우리 반 친구들은 모조리 그 녀석과 친하게 지내지 못해서 안달을 냈을까. 문득 웃음이 난다.


저녁밥을 짓고 있을 때 작은 아이 학교 돌봄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말씀은, 요즘 들어 부쩍 아이가 ‘나는 곧 전학 갈 거니까 너희들과는 이제 친하게 지내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는 것이었다. 최근 큰아이의 중학교 진학문제와 막내의 초등학교 입학 문제 등 많은 여건이 바뀌면서 솔직히 몇 번 이사를 가게 되면 전학 가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당장 문제는 아니라서 마음속으로는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노골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다. 선생님께 거짓 없는 마음을 내비치면서 조금은 길게 통화를 하고 난 뒤 나의 잘못이 무엇인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큰 애들에게 너무나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 안팎으로 고스란히 받는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나 자신도 모르게 표출했다는 것, 그리고 이해해 주고 허용하는 엄마보다는 차단하고 원칙적인 엄마였다는 사실에 작은 아이가 그렇게 전학 간다는 말을 마치 자랑처럼 하게 된 데 내 책임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반면 큰아이는 지금 다니는 학교를 떠나기 싫다며 친구들과 어떻게 헤어지느냐며 굉장히 서운한 감정을 표현했었고 작은 아이는 지금 학교를 떠나면 더 좋은 곳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작은 아이 난독증이 학교 친구 관계조차도 치열해지도록 만들었구나 싶어서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막 귀가한 애들 앞에서는 그 속내를 표현할 수는 없었다. 지금 엄마의 마음이 너희의 문제로 안타깝고 아픈 상태라고.


그렇지만 평소 내 모습대로도 할 수는 없었다. 저녁 먹는 내내 나는 아이들에게 언제나 물어보던 학교생활에 관해 묻지 않았고 별말 없이 있었는데 어쩐지 아이들도 그런 내 모습을 이상하게 여겼던지 돌봄 선생님께서 언급했던 작은 아이와 다툼이 있었다는 아이를 아느냐고 큰아이에게 물었을 때 작은 아이는 ‘어떻게 걔를 알아’ 말을 가로막아 물었는데 나는 대답하지 않고 큰아이의 대답을 듣고만 있었다. 잠자리 들기 전 늘 해오던 숙제 검사도 준비물도 물어보지 않았다. 나도 좀 관심을 덜 보이는 모습을 보여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작은 아이는 내 등 뒤로 와서 앞뒤도 없는 ‘잘못했어요.’하고 말했다. 무엇을 잘못했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그거와 그거라고만 짧게 대답하고선 다시 ‘어떻게 걔를 알았어?’하고 물었다. 평소보다 늦은 상태여서 오늘은 그만 자는 게 좋겠다고만 대답했다.


어릴 때 전학 온 친구한테 반 아이들을 모두 빼앗겼다는 느낌을 받은 건 아마도 내 중심으로 친구들이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 데서 오는 자신감에 대한 실망과 상처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시골뜨기 잘 못사는 집의 아이였고 그 애는 희고 도시에서 잘 살다가 시골로 전학을 온 공부 잘하던 아이였다. 무엇보다 내가 낡은 장난감 같은 존재였다면 그 애는 새것이었다. 그렇다고 내 존재가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석대’는 아니었지만, 그 애의 전학으로 친구들의 태도가 일시적으로 변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주변의 나무나 구름, 하늘처럼 항상 친숙한 것을 경멸하고 무시하게 되는 인간의 습성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오직 새로운 것에 만족을 느끼고 변화를 이끄는 것에 감탄하는 형식적인 것을 더 따르는 본능과도 같은 습관으로 아마도 대상을 겉눈으로만 볼 줄 알았지 인식한 적이 없는 것, 즉, 마음으로 볼 줄 아는 눈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작은아이의 경우는 조금 다른 문제지만 나는 엄마로서 내 아이들에게만큼은 사물을 물리적으로만 인식하지 않기를 바라고 음미하고 느끼고 생각할 줄 아는 보는 힘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생각해 보자면, 노아는 600년 동안을 모든 만물이 존재하는 자연을 누리면서 살다가 방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 각 한 쌍씩의 동물들을 함께 데리고 가지만 여전히 바깥세상과는 달리 거의 모든 것들이 막혀있는 공간이었다. 방주 안에서는 고작 1년, 377일간을 보내지만 어쩌면 600년이라는 바깥에서의 삶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을 하면서 자신과 주변을 인식하고 바라보게 된 시간이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어쩌면 모든 대상을 음미하며 비로소 마음으로 보는 눈을 가지게 된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아이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과 환경, 무엇보다 내 여력의 한계로 인해 많은 부분이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생각처럼 우리들은 많이 누리면서 지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책이라는 도구로 제한된 기회와 체험의 범위를 최대한 넓혀주고자 노력은 해 본다. 읽는 동안, 우리들이 대화하는 동안은 실제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꿈꾸고 느낄 수 있다. 바로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 내게 지나치게 적극적인 이성에게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나에게 무관심한 이성에게 더 끌리는 이유에 대해 묻는다면 다름과 같이 대답할 것 같다. 내게 적극적인 이성이 내가 호감을 느끼는 무관심한 이성보다 덜 매력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나를 너무나 적극적으로 기다리고 있으며 내가 원하는 욕구라면 언제든지 주려고 이미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비단, 이와 꼭 같은 경우가 아니라고 해도 아이들도 어쩌면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언제나 적극적인 존재가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여겼던 나부터 변해야 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물리적인 부재는 내면을 키우는 힘으로 나타날 수 있으니까.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깨어나서 한참을 다시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우선 생각할 것이 너무나 많았고 정적과 어둠이 이미 모든 것들을 나 자신에게로 집중되고 있어서 오히려 잠이 점점 달아나 머리가 맑아지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임에도 밤중에 쓴 글과 한 낮에 쓴 글이 현저하게 달라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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