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두뇌의 탁월한 가소성
2019. 10. 21.
인간의 뇌만큼 가소성이 강한 것도 없다.
작은 아이의 중간 상담이 있던 날 오후, 사실은 큰아이가 수학 전국 올림피아드에 출전하기로 되어 있었던 터라 내 마음이 조금은 분주하고 긴장된 상태였었다. 제대로 된 점심을 먹을 시간이 부족해서 아이들과 시험장으로 가는 길 중간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고 곧장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조금 서둘러 온 탓에 한두 군데 주차할 공간이 있어 마음에 조금씩 여유가 생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수험표 뒷면에 인쇄된 교실 안내 지도를 따라 큰아이를 제 고사장에 데려다주고 나오면서 졸리면 책상에 잠깐 엎드려 자는 것도 좋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조금 긴장된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가볍게 머리카락을 만져주면서 ’이건 그냥 경험이며, 앞으로 이런 종류의 시험이 얼마나 많이 있게 될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일이다. 엄마는 네가 이번 기회에 OMR카드 작성하는 법을 안 것만으로도 이미 배운 것이 있는 거라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아이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시험 시간은 1시간이었다. 그러나 대기시간과 우리가 먼저 도착한 시간을 합쳐서 작은 아이와 막내, 그리고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거의 두 시간에 가까운 양만큼의 시간이었다. 가을 한낮의 날씨란 그 어느 곳에 앉아 있더라도 멋진 풍경화가 눈에 펼쳐지게 되며, 그 어느 곳에다 시선을 옮겨도 마음속에 한가로움을 가져올 정도로 놀랍고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두 아이는 모처럼 흙으로 된 운동장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기 시합을 하고 막대기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교정 모퉁이에 있는 철봉에 점프로 매달려 소매가 길게 늘어진 빨래처럼 작은 몸집을 앞뒤로 가볍게 흔들며 놀기도 했다. 작은 아이는 거의 자기 몸무게와 비슷한 살집이 통통한 막내를 업고 운동장 한가운데까지 왔다가 다시 계단 난간까지 갔다 하면서 동생을 잘 놀아주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시간이 지나가는 걸 한가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어느새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들어야 하는 때라고 생각했던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문득, 아인슈타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벗어진 이마, 뭉뚝한 코,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광대 같은 얼굴, 그리고 그가 입고 있는 흰 가운까지 모두 천재성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인슈타인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었지만 약간 괴팍하고 괴짜가 아니었을까 그런 짐작이 들기도 한다. 그의 상대성 이론이라는 학문적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뇌는 그가 죽은 후에도 뇌의 신비를 밝히는 데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유언에는 자신의 뇌를 인류 발전을 위해 연구용으로 써달라는 내용은 없었지만 그를 검시한 병리학자 토마스 하비 박사가 그의 뇌를 가족들 몰래 빼내어 연구용으로 활용했고 실제로 그는 아인슈타인의 뇌를 검사하면서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고 1㎤ 크기로 뇌를 240조각으로 자른 뒤 여러 연구자에게 보내게 되면서 이런 정보가 누출되고 말았다. 처음 토마스 하비는 아인슈타인의 뇌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기를 거부하였는데 1978년 8월 한 잡지에서 그가 밝힌 내용에 의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늑골 사과주(costa cider)라고 적힌 병에 아인슈타인의 뇌를 보관하고 있었다.
토마스 하비는 “천륜에 어긋나는 짓이고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될만한 문제이기에 당시에는 더욱더 세상에 밝힐 수가 없었다.”라고 회고하였는데 사실 토마스 하비의 그런 부도덕한 용기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인간의 뇌 사용에 관한 사실은 아직도 우주 저 끝 미지의 세계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뇌가 가소성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은 해마다 이맘때, 각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발표될 때면 어김없이 거론되는 인물로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이기 때문이다. 천재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어떤 두뇌를 가진 것일까. 누구나 알고 싶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질문이라는 것,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도 일반인의 경우 두뇌를 1~2% 정도를 쓰는 반면 아인슈타인은 자기 뇌 사용량의 10%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2%, 4%를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실 중요한 논쟁거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그 숫자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은 자신의 뇌 사용량을 늘릴 수 있다는 데 있다.
한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 천재가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바꿔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흐름을 바꾸는 역할의 중심에 바로 내 아이, 나 자신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예 저버린 것일까. 사실 천재와 일반인의 차이의 틈은 매우 좁을 것으로 생각한다. 단지 우리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이 그 차이를 점점 더 벌어지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발상의 방향에서 오는 차이가 아닐까.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의 뇌 사용량과 같이 보통 사람의 뇌 사용량을 늘릴 방법은 또 없는 것일까.
아인슈타인은 어릴 때 지독한 난독증을 앓았던 낙제생이었다. 그런 그를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했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 이것 또한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자 생각이지만 그의 어머니, 부모라고 생각한다. 난독증으로 인하여 문맹인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었던 그에게 끊임없는 사랑과 용기와 관심을 보여주었던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이 문맹인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천재 아인슈타인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잠시 작은 아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마로서 아이가 천재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고백하건대, 내 아이가 아인슈타인의 인생처럼 살아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지금은 글자를 읽고 그 글자에 스스로 감동하고 울먹일 수 있는 아이로 글자를 알게 되어 스스로 훌륭한 글들을 읽을 때 느낄 마음속의 깨달음, 좋아하는 사람에게 단 몇 줄이라도 마음을 전할 수 있는 편지를 쓸 줄 알기만 해도 더없이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다. 만일 뇌가 탄성을 지니고 있다면 인류를 이렇게 발전하지 못하고 여전히 돌도끼 손도끼를 사용하는 원시시대의 사람들처럼 생활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쓰면 쓸수록 개발되고 발전되고 진화하는 것이 인간의 두뇌이다. 엄마로서 나는 내 아이들의 뇌를 그렇게 되도록 해 줄 가장 큰 의무와 책임을 지닌 사람이라고 느낀다. 인간의 뇌세포에는 독서를 주관하는 기능은 없다고 알고 있다. 책을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차이는 순전히 습관과 노력으로 길든다는 말이다. 습관은 오랜 기간의 반복된 행위로 인하여 내 몸에 자연스럽게 생긴 일종의 분신 같은 것이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책을 읽는 습관을 들여줘야겠다는 강한 의지와 의무감을 느낀다.
며칠 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낭독을 마쳤을 때, 그날 온종일 산티아고 노인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저절로 그의 인생이 내 마음속에 그려지게 되었는데, 인생이란 그 순간 위기에 맞서서 이겨내려고 하는 의지가 아닐까, 결국에 남게 되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순간순간을 정정당당하게 맞서 대항했다면 정말로 그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생각했다. 상어 떼를 물리쳐 내기 위해 심지어 작은 칼까지 써버렸고 잡힌 물고기도 머리와 뼈 가시만 남은 채 모두 다 빼앗겼다. 하지만 노인에게는 빼앗기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물고기를 잡을 때의 전략과 행동, 상어 떼를 물리칠 때의 필사적인 노력에서 분명히 삶의 의미에 대한 가치를 느끼고 누구한테도 뺏기지 않도록 마음속에 남게 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앞으로 남은 인생에 대한 일종의 삶의 의지와 희망, 그것이야말로 산티아고 노인이 수확한 가장 큰 보물이라고 여겼다. 누군가는 헤밍웨이를 인생의 허무라고 말하기도 한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실제로 엽총 자살로써 삶을 마감한 그였기 때문이다.
큰아이에게 헤밍웨이 이야기를 해 주자, 아이가 일기장에 ’노벨문학상을 받고 또 엄청난 상금과 유명한 사람이 되었는데도 왜 자살을 했을까? ‘하고, 적은 것을 알았다. ‘지금의 나이엔 그렇게 그게 전부일 수 있겠지. 그러나 아이야. 인생이란 그런 것들이 전부는 아니란다. 아마 헤밍웨이에는 자신이 이겨낼 수 없는, 그래서 삶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참아낼 수 없었던 고통이 있었을 거야. 그 고통을 넘어서지 못했던 거지. 그래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 거야.’ 하고 이야기해 주었지만 실제로 내 말의 뜻을 이해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인생의 무의미를 말할 때, 사실은 그게 아니라 지나온 순간순간의 역경과 고난들을 이겨낸 바로 그 행위가 가져온 극복에의 의지, 삶에 대한 목표가 바로 인생의 무의미를 싹 다 가져갈 가치 있는 의미가 아닐까 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려면 인내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내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고행이라고 여긴다. 가장 힘든 일이면서도 동시에 유일하게 익히고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여긴다. 나 또한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괴팍해지고 자신에게 무척 잔인해지면서도 계속 써 내려갈수록 심각해는 것을 느껴서 좌절하면서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어 어느 순간 체념하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마침내 어느 결과물이라도 나오게 되면 그래도 내 마음속에는 허무함 이상의 텅 빈 공허함으로 가득 찬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토록 하찮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겨지는 나의 결과물에도 나는 한 계단 나를 넘어선 것에 대한 가벼운 상태의 공허한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리라.
어떤 밤, 이렇게 동이 트기 직전의 가장 깜깜한 밤. 이미 잠든 만큼 잠을 자야 아침이 올 시간이 되었을 무렵에 거실로 나가면 온통 까만 어둠만이 들어차 있다는 것을 본다. 하루 중 가장 깜깜할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지금일 것이라고 대답해 줄 수 있을 정도다. 그 어둠을 비집고 들어가 중간쯤에 가만히 서 있으면 어느 순간 이 까만 어둠이 까만빛으로 투명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까만 투명함, 아마 시각장애인이라야 볼 수 있을 그런 빛, 꼭 그런 빛이라고 짐작한다. 나는 어떤 날 그렇게 까맣고 차갑고 무섭게 정적인 깜깜한 투명함에 갇혀 혼자 그렇게 멀리 저 멀리 보이는 흰 투명한 밤별을 한참이나 본 적이 있었다. 달빛이라도 스며들라치면 물리쳐 내고야 말 그런 까만 투명함 안에 갇혀서 나는 그렇게 새벽 별이 질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렸고 또 기다렸다. 무엇을 찾아내려고 알아내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라 눈을 떠도 감아도 똑같이 보이고 느껴지는 그 공간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은 잘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미래를 못 보아도 기다려야 하고 비록 내 미래가 잿빛의 탁한 결과만이 그려진다고 하더라도 내 노년을 기다려야 한다. 다만, 순간순간에 아주 잘 기다려야만 한다.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 참고 인내하는 것임을 스스로 느끼고 알면서 기다려야 한다. 조금 한기가 느껴지는 이 어두운 공간에서 아이들이 잠을 깰 아침을 기다리고 아이들의 입속으로 들어갈 음식을 만들 시간을 기다리고 학교에 데려다줄 시간을 기다리며 또 내 일터에서 할 일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렇게 순간의 순간, 매일 매일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