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난독증 진단 4개월 후, 작은 변화

by 김현이

15. 난독증 진단 4개월 후, 작은 변화


2019. 10. 20.


산티아고 노인은 마치 살아있는 전설이 되어 그렇게 우리 마음속에 남게 되었다. [노인과 바다]를 다 읽고 나서, 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책장에서 꺼내면서 몇 번은 마음속의 갈등을 느끼게 되어 망설이게 되었다. 과연 한 문장 한 문장을 아이들에게 온전하게 설명해 줄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른 새벽, 아이들 등교준비를 마치고 입속에 작은 계란말이를 한 개씩 넣어주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어린 왕자를 만나게 해 주려고 책의 첫 장을 펴고 읽기를 시작했다.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막내는 양은 우리 엄마인데 말하면서 흔하게 알려진 보아뱀이 코끼리를 통째로 집어삼킨 그림, 실루엣만 보고 모든 어른이 모자라고 답했던 그 그림을 보여주면서 나 어릴 적 이야기를 해 주지 않고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지금 작은 아이 나이였을 때 나이 차가 별로 나지 않아서 형제지간처럼 자란 삼촌이 내게 퀴즈를 낸 적이 있었다. 그 보아뱀 그림을 그려놓고 이게 무엇인지 맞춰보라는 거였다. 그때 나는 거의 모든 어른처럼 ‘모자’라고 답하지는 않았었다.


”삼촌! 그건 꼬마가 숨바꼭질하는데 숨을 곳이 없어서 이불 속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모습 같아.‘


삼촌은 그렇게 말하는 내게 ’역시 아직은 충분히 티 없는 때이구나.’라고 했던 말을 그때는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리고 대칭이 분명하지 않은 그 그림이 어째서 모자라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솜씨가 되게 없는 사람이 그린 그림이 분명하다고만 생각했었다. 그 후, 시간이 한 참 지난 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될 때 그 겨울, 나는 제대로 어린 왕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 꼬마들은 처음 그림을 퀴즈로 풀었던 나와 같은 또래인데 어린 왕자와의 아름다운 인연을 맺어줄 확신이 분명히 없었다.


어쨌든 삼 일 전, ’양 한 마리만 그려줘. ‘를 끝으로 어린 왕자는 시작되었다.


선우의 4개월 뒤의 변화


선우는 통 문장에서 단어 몇 개를 뺀 이 빠진 받아쓰기 시험을 보고 있다. 담임 선생님과 상담이 있은 뒤로 아이에게 그렇게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신 거다. 그 뒤부터 아이는 받아쓰기 시험을 100점, 90점 이렇게 번갈아 가면서 받는다. 기분이 좋다고 했다. 이제는 글자가 좋아진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입을 보면서 나는 어찌나 마음이 흐뭇했었는지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나의 기분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리라.

두뇌 센터 원장님과 중간 상담을 하면서 무엇하나 부끄러울 것 없는 아이의 상태를 가장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동안 무엇보다 가장 만족할 만한 것은 작은 아이로 인해 모든 아이와의 관계가 더 원만하고 친밀해지고 좋아졌다는 것에 있었다. 나는 욕심으로 가득 차서 다른 아이들과 내 아이를 비교하는 그런 엄마에서 이제 조금씩 내 아이의 본연의 특징을 바라보고 그것을 장점으로 보게 되고 그러면서 조금 더 편안한 마음이 되어 아이를 더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결과였다. 선우는 처음보다 거의 모든 면에서 향상되었다고 말했다. 분명히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검사지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나는 몇 달 전, 그 상황을 다시 한번 생각이 나서 조금은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부모에게 아이가 글자를 못 배우는 병이 있다는 통보만큼 좌절하게 만드는 게 또 있을까. 나는 그때 몇 날 며칠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조금은 한심하게 일주일을 넘게 방황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방황하지 않는다. 가야 할 길을 정해서 이미 출발한 지 좀 한참 지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문득 니체가 했던 철학적인 말들이 나를 위로해 주고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는 것도 알았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정도의 고통은 나를 더욱더 강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신경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빅토르 프랭클은 제2차 세계대전, 아우슈비츠에서, 그다음 카우페링과 튀르크 하임에서 여섯 번째 겨울을 보내면서 모든 고통과 죽음에 가까운 역경 속에서도 오히려 마음과 정신은 더 건강하고 윤택해 짐으로써 생존했고 꺾이지 않았고 그 고통으로 가득했던 순간들을 로고테라피를 증명하는 기회로 삼았다는 것이다.


모든 시련은 그냥 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냥 지나가지도 않는다. 작은 아이의 난독증도 그냥 오지 않았을 것이며 또 나는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수용소에서의 비슷한 조건에서도 더 일찍 좌절하고 빠르고 쉽게 죽어갔던 사람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삶의 기대 의지와 희망이 사라졌던 사람들이었다. 이 순간 나는 아이들이 둘러싸고 있는 이 작고 낡고 초라한 공간에서 얼마나 멋지고 위대한 꿈을 품고 있는지 모른다. 그 꿈이 장대하여 마치 훗날 거대한 궁전을 꿈꾸는 허황한 꿈이 아니라는 것, 나는 엄마로서 내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아서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그래서 스스로 나는 성실하고 바른 사람이며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기도하고 꿈꾼다. 밖으로의 박수 소리보다는 내 안에서 울려 퍼져 나오는 작은 소리지만 울림이 큰 그 의미 있는 것에 집중하며 사는 힘이 있는 사람으로, 자신만의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잡힌 사람으로 키워내야 한다는 꿈을 꾸고 희망을 품은 것이다.


모든 것을 뺏어가는, 심지어 금니까지 뽑아갔던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책을 읽고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엄마에게 아이가 물었다.


“엄마에게는 이런 순간에 책을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가진 것을 전부 다 뺏어가고 빼앗기잖아요.”


슬퍼 보이지만 영롱하고 투명하게 빛나는 아이의 두 눈을 보면서 엄마는 이렇게 대답한다.


“엄마가 읽고 너에게 읽어주는 책 속의 의미는 절대로 저들이 빼앗아가지 못하는 것이란다.”


사람은 누구한테나 자기만이 간직하는 특별히 소중한 의미의 무엇인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나에게 무엇인지 또 무엇이 될지 알아가고 찾아내서 지켜내기 위해 성실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그것이야말로 인생에 부여된 인간의 삶의 최대 의무가 아닐지 조용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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