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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이 Nov 09. 2017

1. 모내기


  [수인아! 부뚜 막 옆 찬장 아래부터 두 번째 서랍에 천 원짜리 두 장 넣어 뒀으니까 학교에서 오면 창수아저씨네 점방에 가서 막걸리 반 되만 사가지고 논으로 와. 거스름돈 남기지 말고 남은 돈은 너 먹고 싶은 거 하고 해서. 부뚜막에 깨 밥 비벼서 국그릇으로 덮어 놨으니까 그거 먹고. 알았지? 올 때 가깝다고 큰 도랑으로 건너오지 말고 우체부 아저씨네 밭둑길 따라서 오거라. 뱀 조심하고. 엄마가......]

  아침에 잠이 덜 깬 나를 붙들고 엄마가 했던 말들이다. 엄마 손이 언제나 젖어 있어서 중간 중간 물방울이 떨어진 탓인지 모기에 물린 자국처럼 둥글게 종이 특유의 섬유가 신경을 곤두세운 것처럼 보인다. 움푹 들어간 것도 튀어나온 것도 아닌 그래서 손으로 일부러 약간 구긴 듯 반듯하지 않은 회색 빛 갱지에 쓰인 엄마의 글씨체를 구경한다. 

  1학년 바른생활 책 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종이에다 나 알아보기 쉽도록 또박또박 큼지막하게 써진 글씨를 두 번째 읽는다. 그리고 왼손에 대충 쥔 채로 부엌으로 가서 크기가 다른 무쇠 솥이 나란히 걸린 쪽 왼편 뒷문에 난 시멘트 회반죽으로 말끔해진 문아래 걸쳐 앉았다. 거기는 아버지가 전번 날 어디서 시멘트를 구해 와서 전문가보다 더 훨씬 훌륭한 미장이가 되어 쩍 갈라지고 울퉁불퉁한 부뚜막을 말끔하게 회반죽을 발라놨기 때문에 마치 새로 페인트 칠 한 것처럼 깨끗한 것이 그 자리가 맘에 쏙 들었다.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도 회반죽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다. 엄마가 함박에 떠오다 흘린 물 탓에 훨씬 더 빨리 굳었으리라. 회반죽은 마치 마술같이도 물속에서 더 단단하게 굳는 법이니까. 

  그 자리에 앉으면 나무 뒷문 사이사이로 동산을 타고 내려온 시원한 바람까지 초여름 점심 먹기엔 더없이 훌륭한 장소였다. 더구나 솥이 걸린 아궁이는 불에 그을린 자국 때문에 앉으면 숯 검댕이 묻어나서 엄마한테 꾸지람을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텐으로 된 국그릇을 열어보니 밥 그릇 둘레의 크기 모양대로 동글동글 붙어 있던 물방울이 왼손에 쥐고 있던 엄마 편지에 국 그릇 안쪽 벽을 타고 또르르 몇 방울 떨어진다. 아침에 했던 뜨거운 밥에 비벼 놓았던 모양이다. 뜨겁게 비벼진 깨 밥이 반나절 내내 더위를 식히느라 흘린 땀방울이다. 왼손에 있던 엄마의 편지, 내 손바닥 지문대로 물결모양이 나 있는 편지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밥 한 숟가락 크게 떠먹는다. 갱지 - 뒷집 영길네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얼굴이 겹쳐 보인다. 그리고 내 오른쪽 옆 찬장 아래에서 두 번째 서랍에 달린 십 원짜리 같이 생긴 손잡이를 잡아 당겨본다. 반으로 포개진 천 원짜리가 연 회색 사기로 된 간장 종지에 몸이 눌려 있다. 숟가락으로 싹싹 긁어서 바닥이 보일 때까지 잘도 먹는다. 숟가락으로 잘 떠지지 않은 으깨진 밥풀과 깨알을 그릇 끝까지 쓸어놓고 입으로 떼어 먹는다. 다 먹은 숟가락을 그릇에 넣는다. 쇠 긁히는 소리 – 찌익. 옆에 물이 반쯤 담긴 갈색 고무로 된 함박에 담가 놓는다. 깨 기름이 물위에 둥둥 떠올라 둥글둥글 은빛 날개 달린 나비가 되어 수면에 살포시 앉는다. 꼭 함박이 요술을 부리는 것 같다. 

  찬장 옆에 나무로 짜여 누런 장판을 덮어 씌어 놓은 선반 구석에 주전자가 보인다. 움푹 움푹 꺼지고 수세미에 닳고 닳아서 낡은 누런 옷 걸친 듯 회백색 속살이 듬성듬성 드러난 양은 주전자 – 꼭지가 둥글게 말려 올라가 있고 입구가 좁다래서 몸체 수그리면 가는 물줄기를 폭이 넓은 포물선 그리며 멀리까지 뜀뛰기 할 수도 있는 우리 집 막걸리 주전자 – 나와 동갑내기 세간살이 양은 주전자가 보인다. 팔이 안 닿아서 찬장 바닥에 발 쏙 넣어 올라타 주전자를 내린다. 천 원짜리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대문 없는 마당 입구로 나오는데 담벼락 끝기둥 옆에 있는 개집에서 덕구가 나와 두 다리를 앞으로 곧게 펴고 사람처럼 기지개를 편다. 덕구 밥그릇에 사료 몇 개가 나뒹굴고 물그릇은 비어 있다. 마당을 나서려다가 다시 수돗가로 가서 주전자에 수돗물을 받는다. 물그릇에 막걸리 주전자에 뜬 물을 줄 줄 줄 따라 준다. 착한 덕구가 분홍빛 기다란 혀를 날름 날름거리면서 물을 마신다. 

  “덕구야~ 논에 갔다 올게. 집 잘 봐라!"

  덕구를 뒤로 하고 삽짝거리를 따라 나오는데 나 학교 가는 거 안 보일 때까지 쳐다보고 있는 엄마처럼 눈으로 나를 배웅하듯 말없이 살랑 살랑 꼬리만 흔들고 있다. 마치 집을 잘 보고 있겠노라는 대답이라도 하는 것 같다.

  나무로 짜인 창틀에 반투명 유리 사이로 진열되어 있는 과자들이 으깨져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저씨! 막걸리 주세요!” 말하는데 대답이 없다. 

  ‘들에 가셨나?’ 

  “아저씨~! 막걸리 사러 왔다니까요~?”

  나는 부르기를 포기하고 이젠 점빵 마루에 걸쳐 앉는다. 방으로 연결된 작은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수인이 왔냐?”

  “뒷간에 앉아 있다가 니 목소리가 하도 애타서 보다 말고 나왔다니까. 뭐 살라고?”

  나는 손을 주머니에 쑥 넣는다. 엄마가 쓰고 가신 손 편지 종이는 얇지만 더 뻣뻣하고 천 원짜리는 그보다 좀 더 두껍지만 부드러운 촉감이다. 나는 확인해볼 것도 없이 손가락을 잘 돌려가며 돈만 쏙 골라냈다. 돈과 주전자를 같이 내밀며,

  “막걸리 주세요.” 

  “그려, 오늘 모심으로 갔지?” “누구 품 산 줄 아나?”

  “몰라요.”

  눈앞에 진열되어 있는 과자봉지만 둘러보면서 건성으로 대답한다. 

  “남은 돈은 쿨피스 한 통이랑 빵, 빵으로 다 주세요.” 

  “주전자 줘 봐라”

  아저씨는 마루 맨 끝자리에 탁한 빨강색의 고무통의 둥근 뚜껑을 연다. 거기에 다시 끈에 묶인 선명한 빨강색 자루바가지가 쌀뜸물 보다 탁한 막걸리 위에서 둥둥 떠 있다. 아저씨는 주전자가 넘치게 술을 몇 번이고 담는다. 내 친구 양은 주전자는 금방 취한 사람같이 좁은 주둥이로 막걸리를 조금 토해냈다..

  “여기 있다. 그런데 수인이 너 이거 잘 들고 갈 수 있겠냐? 안 무겁겠어?” 

  “뭐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닌데요.”

  한 손엔 무거워진 주전자를 들고 남은 손엔 빵과 쿨피스가 들어 있는 검정색 비닐봉지를 들고 나무문을 나오려는데 창수아저씨가 나를 부른다. 

  “수인아! 잠깐만 있어봐라.” 

  다리를 반쯤 문턱에 걸치다 말고 돌아보자 아저씨가 계란만한 눈깔사탕 한 개를 봉지 안에다 넣어 준다. 

  “조심해서 들고 가라. 가다가 넘어지지 말고.” 

  “예. 고맙습니다. 아저씨”

  창수아저씨가 준 눈깔사탕은 정말로 달고 딱딱하다. 입속에 넣다 뺐다 하면서 하루 종일 먹어도 그 크기가 반도 작아지지 않는다. 사탕꼭지부터 무지개처럼 둥글게 새로 줄이 나 있는 눈깔사탕 생각으로 주전자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마을을 완전히 벗어나자 아스팔트 신작로가 보이고 약 10미터 거리에 행이짓거리 다리가 보인다. 이미 환한 대낮에도 나는 저 다리 지나기를 항상 주저했었다. 다리 아래에는 동네에 초상이라도 나면 꽃상여를 이는 길고 가는 통나무가 매달려 있었고 다리를 기점으로 바로 앞은 거의 90도 가까이 꺾여 나 있는 도로라서 교통사고가 났다고 하면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일이 잊을 만하면 생겼기 때문이다. 

  벌써 지난여름에도 작은 오빠랑 동갑 친구였던 엄마 아빠 없이 큰 언니랑 같이 살며 동네에서 고아로 여기던 민선이 언니가 학교 갔다가 오늘 길에 차에 치어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 언니가 죽었을 때 동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이고, 부모 복도 없는 것이 저리도 불쌍하게 살다가 죽는구나.’하고 모두들 안타까워서 했던 말들을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논까지 가려면 저 다리를 꼭 지나쳐야 했었고 그 순간의 공포심을 벗어나려고 항상 달음질쳐 지나던 다리인데 오늘은 양손의 무게를 견디며 겨우 겨우 걸어왔는데 어떻게 달릴 수 있단 말인가. 아~ 우체부 아저씨네 식구들이 다리 옆에서 새참을 드시고 있는 게 보인다. 저렇게 사람이 많은데 다리 밑 귀신이라 봤자 찍소리도 내지 못할 테지. 나는 용기나 났다. 주전자의 무게로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몸을 절름발이 걸음으로 뒤뚱뒤뚱 걸어간다. 

  “수인이 논에 가냐? 여 콩죽 먹고 가라.” 

  “깨 밥 먹고 왔어요. 괜찮아요.” 

 흘깃 바라보니 스텐 그릇에 뽀얀 콩죽이 넘치게도 담겨 있다. 

  “야! 야~ 막걸리 다 샌다. 논에 가면 반 밖에 안 남겠구먼.”

  웃는다. 아줌마도 웃고 아저씨도 웃다. 어른들 웃음소리 탓에 다리 밑 귀신은 아마 꼼짝도 못하고 붙어 있을게 뻔하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새를 이용해 빨리 걸어보려고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수인이 땅으로 꺼지겠다.“

  또 웃는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억울한 생각이 든다. 내가 놀림꺼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 생각이 들자 다리 밑 귀신의 존재도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상대쯤으로 안중에도 없어지고 오로지 분한 생각만 든다. 아주머니 아저씨 웃음소리도 목구멍 콩죽 넘어가는 소리도 숟가락으로 스텐그릇 긁는 소리도 멀어진다. 이제 독만이네 돈 둑길만 지나가면 우리 논이다. 아니 아버지가 농사짓는 논이다. 

  ”엄마, 아버지~! 나 왔어. 막걸리 사갖고 왔어.“ 

  소매를 팔꿈치 위로 걷어 올리고 바지를 둘둘 말아 장딴지까지 치켜 입은 아버지가 먼저 허리를 펴고 나를 바라보신다. 

  “수인이 왔네~.” 

  “응” 

  엄마도 손에 들고 있던 모찌를 다 심고 그제야 허리를 펴고 나를 보며 손을 흔든다.

  “우리 수인이 왔네?” 금방 나갈 테니 잠깐만 앉아 있어라.“

  나는 그제야 들고 있던 주전자를 자리가 가장 평평한 논둑에 내려놓는다. 정말로 내 키가 반으로 줄어 버린 기분이 든다. 아버지가 논에서 나와 내 앞에 섰을 때 그날따라 유난히 커 보이던 아버지가 흙 묻은 손을 논물에 대충 씻어 내고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셨을 때 내 눈은 아버지 허리 춤 밖에는 닿지 않았었던 것으로 보아 분명히 한 10센티미터는 정말 땅으로 꺼져 버린 게 아닌 가 우체부 아저씨네 아주머니가 웃으며 놀리 듯 했던 말이 그렇게 심각하게 들렸던 것이다. 뒤따라 논길을 걸어오는 엄마를 보자 우울했던 기분도 금방 사라진다. 엄마는 논물이 튀어 얼룩얼룩 해진 옷도 아랑곳없이 나를 안아보고 

  ”우리 수인이 다 컸네, 무거운데 저걸 용하게 잘도 들고 왔네?“ 

  검정봉지 안에 든 크림빵 한 봉지 옆구리를 쭉 찢어서 아버지한테 내밀면서 막걸리 뚜껑을 열어 보신다.

  ”오늘은 한모금도 안 먹었는가보네?“ 

  웃으며 내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어 주신다. 사실 막걸리 심부름을 하다보면 항상 넘치게 담아 주는 창수아저씨 탓에 내 걸음걸이에 따라 같이 흔들리는 주전자는 항상 막걸리를 내 바지 가랑이를 조금씩 조금씩 적셔 놓았고 나는 내 바지가 막걸리에 젖어서 마치 옷에 오줌이라도 싼 것처럼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이 무척 싫었으므로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나와 아무도 안보는 데서 주둥이에 입을 대고 홀짝 홀짝 막걸리 맛을 보았던 것이다. 

  ”아버지! 모 많이 심었네?“ 

  ”응, 그래도 내일까지 해야 다 심는다.“ 

  ”아버지! 이 논 아버지 꺼야?“ 

  ”아니, 그런데 곧 아버지 논 될 거다.“ 

  ”그럼 지금은 누구네 꺼야?“ 

  ”우리 수인이 그게 궁금하나?“ 

  ”응, 아버지 논도 아닌데 우리 쌀을 심어도 되는 가 싶어가지고.“ 

  ”심어도 되지. 가을에 쌀 한 포대 갖다 주면 된다.“ 

  ”그럼 이 논은 진짜로 누구네 꺼야?“ 

  ”호박 할아버지네.“ 

  엄마는 검정 봉지 안에 왕 눈깔사탕을 보고, 

  ”창수아저씨가 주셨는가 보네?“ 하면서, 

  ”사탕 먹지 않고 왜“ 

  ”응, 있다 집에서 큰오빠랑 작은오빠 오면 같이 먹으면 된다.“ 

  엄마는 주전자에 든 막걸리를 스텐 밥그릇에 넘치도록 붓고 아버지에게 잔을 내밀고 아버지는 숨도 한번 안 쉬고 그릇 한 가득 막걸리는 단숨에 마신다. 술이 넘어가는 아버지의 목에 이상한 혹이 솟아 올라있었다. 

  “당신도 한 잔 줄까?”

  “제가 언제 술 먹는 거 보셨어요?”

하신다. 

  “아버지, 그런데 오늘 품은 안 샀어?”

  “품을 왜 사나, 이렇게 예쁜 엄마랑 둘이서만 모심는 게 얼마나 즐거운데. 왜 뭣 하러 돈줘가며 다른 사람 부리면서 이 좋은 시간 뺏기겠나.” 

  너털웃음으로 막걸리를 들이키는 아버지를 고개도 못 들고

  “수호아버지도 참 애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요.” 

  하시며 얼굴을 약간 붉힌다. 술잔은 아버지가 비웠는데 꼭 엄마가 술을 마신 얼굴처럼 볼이 연 분홍 빛으로 상기된다. 우리 엄마 꼭 텔레비전에 나오는 탤런트같이 곱다. 우리 엄마지만 참말로 곱다. 

  아침에 싸온 찬거리를 싼 분홍빛 보자기에다 남은 막걸리와 봉지를 곱게 싸 놓고 아버지와 엄마는 다시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논바닥으로 들어간다. 

  “수인아, 너는 저 아래 냇가에서 발이라도 담그고 있어라.”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도 끄덕거리지도 않고 말없이 아버지와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땅에 박은 못처럼 제자리에 앉아 있다. 둥근 계단 모양식의 논들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부드러운 물결을 일으키며 제 몸을 흔들어 댄다. 마치 참기름을 떨어뜨려 놓은 듯 반짝반짝 거리는 것이 눈이 부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논두렁 가장자리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나란히 서서 중간 중간 일정한 간격으로 빨간 표시가 나 있는 모내기 줄 자루 두 개를 10센티미터 거리를 두고 박아 놓고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모찌를 한 웅큼씩 손에 쥐고 허리를 숙여 어린모를 심는다. 마치 이 풍경은 작은오빠가 마루에 뒹굴며 보던 책에서 본 듯한 그림과 흡사하다. 내가 무슨 책이냐고 물었을 때 가볍게 꿀밤을 주며 

‘너는 꼬마사건이나 알라니깐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냐.’

  핀잔을 주던 그래서 더 인상적이던 그림과 너무 닮았다. 뿌리가 반쯤 땅에 박힌 어린모가 제 몸을 반쯤 물속에 담그고 연두색 끝자락만 바람결 따라 흔들리는 물결에 몸을 맡긴 듯 왔다 갔다 한다. 문득 할 일이 생각이라도 난 사람처럼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종아리 반쯤 내려온 바지를 장딴지까지 걷어 올린다. 신발을 벗어 놓고 왼쪽 발을 논에 살포시 담근다. 미지근한 논물 탓에 발바닥에 닿는 논바닥 흙이 부드럽고 따뜻하다. 수제비 반죽 같은 찰진 논흙은 이제 도망치는 한 마리의 통통한 미꾸라지가 되어 내 발가락 사이에 난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간지럽다. 저절로 웃음이 난다. 나머지 발도 이미 논 바닥에 들어 놨다. 복숭아뼈까지 흙속에 잠긴 것 같다. 걸어가야 하는데 논바닥에 발목이 잡혀서 쉽게 걷기가 어렵다. 내가 저항할 수 있을 정도의 기분 좋은 느낌이다. 이번에야 말로 정말로 내가 땅으로 꺼져서 키가 10센티미터쯤 작아진 기분이 든다. 뿌리 뽑힌 풀들 듬성듬성 물위에 둥둥 떠 있고 논바닥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막걸리 닮은 반투명한 물 때문인지 마치 내 걸음 걸음이 내 딛을 때마다 발밑에 커다란 지렁이라도 밟을 것 같은 약간의 두려움과 호기심에 내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버지! 나도 모 심어 볼 테야.” 

  그려, 어디 한번 해 봐라. 올 가을에 쌀 나오면 수인도 많이 먹어야 하니까.” 

  왼손에 쥐어 있던 모찌를 반쯤 덜어서 내 왼손에다 쥐어 주고 네다섯 포기를 떼어 남은 오른손을 잡고 논바닥에다 꾹 눌러 심는 시범을 보여주신다. 아까 발가락을 간지럽히던 미꾸라지가 이번에는 내 손가락 사이로 놀이터를 옮겨왔는가 보다.

  “이렇게 하면 된다. 할 수 있겠나?” 

  나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빨간색 표시가 난 못줄을 따라 마치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돌쟁이 아기처럼 느린 속도로 한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겨 나간다. 아기라기보다는 마치 한 마리의 가재가 된 것 같다. 다섯 번 정도 심었을까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미처 땅에 박히지 못한 어린모들이 좀 전에 떠다니던 풀잎들같이 몸을 일자로 뻗고 물위에 둥둥 떠올라 있다. 왼쪽에서 둥둥 떠다니는 모를 모아서 다시 고쳐 심으며 따라오던 엄마가 한 마디 하신다. 

  “수인이는 한 살 더 먹으면 해야겠네. 저러면 못 크고 죽는다.” 

  나는 모심기를 포기하고 걸음마다 붙들리는 불편한 발걸음으로 논두렁까지 나온다. 마치 쇠로된 신을 신고 지남철 위를 걷는 듯 한 기분이다. 논물 밖으로 나온 내 작은 발은 진회색 빛의 흙에 쌓여 있다. 간지럽다.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아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줄 한줄 못줄을 뒤로 빼가면서 하는 모내기를 구경한다. 서쪽 능선에서 한 참 멀리 떨어진 곳에 해가 떠 있는 것 같은데 눈이 부신 탓에 해를 똑바로 올려다 볼 수가 없다. 밤하늘에 뜬 별처럼 물 댄 논이 반짝거린다. 벌써 내 발등의 진흙은 부엌 뒷문에 발라진 회반죽같이 밝은 회색빛으로 말라붙어 버렸다. 눈꺼풀이 무겁다. 나는 아예 햇살이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아 버린다.  

  “엄마, 아버지! 

 감기던 눈이 번쩍 뜨인다. 아! 작은오빠다. 

  “오빠~! 작은오빠~! 학교 끝났어?”

 작은오빠는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는 듯 하더니,

  “모 심을라고 왔어요.”

  아버지는 이번에도 내가 논에 처음 당도하였을 때와 똑 같이 왼손에 남은 모찌를 마저 심고서야 허리를 쭉 펴신다. 

  “수영이 왔나. 학교는 일찍 마쳤는갑네.”

  “오늘 토요일이잖아요. 반은 심었네! 수인이 너는 모 안 심고 자고 있었나?”

  “아니다.”

  나는 주먹 쥔 손에서 집게손가락만 길게 빼고는 내가 몇 군데 심었던 곳을 가리킨다.

  “저기, 저기. 하나! 둘! 셋! 나도 몇 번 심었다 뭐.”

  못줄이 쳐 있는 곳을 기점으로 한 줄 한 줄 눈을 옮겨가는데 나도 내가 어디에서 모를 심었는지 분간이 안 된다. 

  그렇게 작은 오빠가 합류된 모내기는 해질녘 두어 시간을 앞두고 제법 많은 부분에 어린모들이 제 자기를 차지하게 되면서 겨울날 엄마가 짜는 손뜨개 스웨터처럼 점점 그 모양을 잡아가고 있었다. 

  “수영이 때문에 많이 심었다. 봐라, 사람 한손 보태는 게 이렇게 표시가 나나. 수인아~! 아버지 지게 타고 갈래?”

  “응, 나 아버지 지게 타는 거 좋다.”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는 엄마의 볼 언저리까지 석양이 물들어 있어 또 다시 수줍게 붉히던 엄마의 얼굴이 되었다. 사실 그건 볕에 붉게 탄 엄마의 볼인 줄 모르고 엄마는 기분이 좋으면 얼굴이 붉어지나 생각한다. 작은오빠는 허리까지 오는 중간 중간 옹이가 진 길 다란 나무 막대기를 들고 뱀 쫒는다고 애꿎은 풀 섶에다 매질을 해대며 조타수가 되었고 지게에 올라 탄 나는 걸음마다 논의 진흙으로 얼룩진 아버지의 장화 발끝만 보였으므로 꼭 반달모양의 바지게가 바다에 띄운 조각배가 되어서 이제 막 항해를 시작한 듯이 밀리는 요동 때문에 배 멀미가 나는 것처럼 어지러워져서 지게 양쪽 귀를 꽉 잡고서 분홍색 보자기로 싼 봇짐을 머리고 이고 뒤따라오는 엄마가 불안하여 힐끗 쳐다보게 된다. 이미 서쪽 산골짜기로 몸을 감춰버린 해가 떠 있던 자리는 엄마의 붉은 볼처럼 잔득 상기되어 있었고 마치 육지로 달음질치는 파도가 계속 숨을 참으면서 입속에 물고 있던 하얀 거품을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한꺼번에 토해 버린 듯 흩어진 모양의 구름들이 무질서하게 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식구는 내일 광산에 가는 아버지만을 남겨두고 이곳으로 와서 밤 동안 어린 모 잘 끌어안고 품어준 따뜻하고 부드러운 논바닥을 다시 어루만져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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