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만이 기억하는 슬픈 뒷모습이 있다.
동짓달 새벽 6시는
아직 별들의 나라다.
잠자리 납덩이같은 눈꺼풀로 휘청이며
걸어나가는 당신의 모습은
가히 형벌이다.
어느 잘난 체하는 못난 남편 살리려 아우르는
소리없는 채찍이다.
당신의 육신은 아직 수면 중인데
반 공기의 밥
목에 밀어 넣어야하는 5분이
5년을 더 보게 하는구나.
대문 앞 남들은 새벽운동 나갈 때
휘파람 불며 새벽 이른 먼 동을 부를 때에
또 하루어치의 나른한 짐을 얹고 떠나야하는
백밀러 속의 당신.
잠시라도 눈 좀 감고 있어도 좋으련만
오히려 민망해하는 모습의 당신이
나는 더 섧다.
나는 그런 당신을
응급환자 나르듯
쾌속질주를 자랑삼는다.
짧은 10여분의 여정,
그 시간에도 당신은
내 하루어치의 미소를, 희망가를
뽑아올리는 마 술 사.
오 마이 캡틴
오 마이 갓
2006 아빠의 일기 중에서
아빠는 대한민국 최연소 건축사였다.
젊은 나이에 일이 얼마나 많은지
엄마와 소개팅을 하는 날엔 일이 바빠
약속도 잊고 2시간을 늦었다고 한다.
또 돈도 설계한 만큼 벌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돈은,
형편이 어려운 친척들의 대학등록금이 되었고
우리 동네 판자집들의 쌀 값이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빠를 도왔던 친구들의
급한 사업자금이 되어주었다고도 한다.
또 직업을 잃은 친구에게는
사무실 한켠에 책상과 의자를 놓아주고
집에만 있지 말고 매일 사무실에 나와서
점심이라도 먹고가노라 하셨다고 한다.
아빠의 도움을 받았던 모든 분들은
아빠 장례식장에서
참 많이 우셨다.
IMF 금융위기가 오고
건설경기가 제일 먼저 힘들어졌지만
사무실 기사아저씨들을
단 한분도 내보내지 않고
벌이가 없던 7년을
적금을 깨고 땅을 팔아 월급을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가 내게 어느 날 말했다.
우리 집 통장에 백만원이 남았다고.
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한번도 용돈을 받아서 써 본 적이 없다.
하필이면
내가 화장도 하고 싶고 스커트도 입고 싶던
그 때,
바로 그 때,
우리집이 가난해졌다.
운이 나빴다고 하기엔
그 시절 내가 느낀 것이 참 많으니
난 그 위기가
지금 돌이켜보면 나를 조금 더 성장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청바지와 티셔츠 단벌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받은 돈으로
용돈을 하며 지냈다.
무엇보다
사모님이라고 불리던 엄마가
속옷 보따리 장사를 하게 되었다.
엄마는 젊은 시절
수원에서 k제약 실험실 팀장이었다고 했다.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었고
오빠와 나를 낳고 키우며 살림만 했는데
설계 밖에, 글 쓰는 것 밖에 모르던
남편을 대신하여
커다란 짐에 속옷을 넣고 여기저기 가서
파는 일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얌전한 나의 엄마는
그 안에 잔다르크같은 씩씩함이 있었나보다.
나는 그 짐보따리를 든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사실, 방황을 했다.
못난 짓이란 못난 짓은 모조리 다하고 다녔다.
그 뒷 모습이 너무 아파서 잊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생 시절 나는,
사춘기같은게 뒤늦게 왔다.
왜 가슴이 아픈 청소년들이
반항하고 방황하는지
이제 나는 아주 잘 알게 되었다.
맨 위의 저 일기는
그런 엄마를 매일 태워나르며
느낀 것을 아빠가 적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내의 뒷모습에
아빠도 적지 않게 방황하고 반항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방황과 반항의 뒷모습에는
너무 사랑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 때문에
마음이 너무 아프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생존의 본능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