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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h May 06. 2024

시대별 향취의 낭만이 추억속으로.


나이를 먹을수록 대부분 인간은 나아가는것보단 뒤로 가는것을 선호한다. 새로운것은 낮설고 익숙한 과거가 그립기에 진보 성향 보다는 기존과 과거 방식을 고수하는 보수 성향을 띄게 된다. 그곳에 자신의 젊음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60년대 끝자락에 태어난 나의 어릴적 기억의 주배경은 70년대다. 청소년 때의 기억은 80년대 이며 성인이 막 되서 사회에 부딫쳐 나갈때의 시대는 90년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때가 2천년 밀레니엄을 맞았을때이다. 그 이후, 10년대 부터는 중년의 입구에 들어선다. 30년쯤 부턴 말년으로 접어들것을 이미 예약해 놨다.


지금 아이들은 멀뚱 쳐다보고 관심도 안 가질 빤한말인데  나 어릴적에 이 아저씨가 이 말을 내뱉으면 전국민이 다 자지러지게 웃었다.


어느 시대가 더 좋다 라는것은 전적으로 개인이 어떤 나이에 어떤 시대를 통과했는가에 따른 주관적 감성이다. 어느 시대나 힘든 삶을 사는 사람과 행복한 사람이 있다. 나의 소회는 어느 시대나 제각각 시대가 제공하는 낭만이 있고 개성이 있으며 싫고 좋았던것들이 있다란 것이다. 대부분 그때도 안 좋았던것은 지금봐도 마찬가지다.


인류 공통으로 대중문화에서 공통적 변화의 초점이 맞춰지는 때가 있다. 1984년.1999년. 2000. 2012년도가 그러하다. 지나기 전 까지는 모두가 큰 변화(기존 문명의 붕괴)가 올거라고 주시했던 불안한 미래였지만 고개를 넘어가고 나면 해프닝이 되면서 과거로 밀려나 역사의 기록으로 추억이 될뿐이다.



1984는 조지오웰의 상상력에 기반한 암울한 미래 소설이 기둥이었고 1999는 (일본 작가의 농간에) 노스트라 다무스의 종말론이 유행하면서 지구촌 전체의 화제가 되었다. 2000 은 밀레니엄 파동이라고 이진법을 기반으로 하는 컴퓨터 디지털에 대한 두려움이 세상을 마비 시킬거라는 우려가 매스컴을 통해 세상을 뒤흔들었다. 2012는 채널링과 뉴에이지 열풍이 사람들을 선동한 결과다. 모두 별 이상없이 넘어가 시대적 해프닝이 되었다. 나는 그 모든 시대적 해프닝을 가장 좋은 관람좌석에 앉아 통과하며 누렸던 586 세대다.



얼마전 80대 중반을 향해가는 병든 노모와 함께 주말벚꽃 나들이를 시도했던 적이 있다. 타이밍을 놏쳐 결국 며칠 차이로 벛꽃이 다 진 바람에 무산되었지만 힘들게 외출한김에 엄마가 가보고 싶은 곳을 드라이브 하기로 했다. 엄마의 젊은시절 추억이 담긴 ‘예뫼골’ 이란 80년대 산골 레스토랑을 찾아 꼬부랑 산길을 가는동안 아이처럼 들뜬 엄마의 회상 이야기에 나 역시 그 시대로 돌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엄마의 나이를 내가 이미 훌쩍 지나버렸으니 다시금 기억을 생각케 한다.


술도 못 마시는 엄마가 그곳에서 처음으로 핑크 마티니를 마셨는데 너무 맛있었다고 그날의 황홀함을 회상하며 핑크 마티니 타령을 한다. 누가 들으면 엄청난 칵테일 애호가 인줄 알텐데 외식이라고 해도 80년대 고기집이나 다니던 40대 아줌마가 평생 딱 한번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초대받아 어쩌다 한번 정장 차려입고 마셔본거다.


아쉽게도 이미 철거돼 공사중이라 엄마가 얼마전 까지도 자주갔다는 고기집을 가려했지만 가는도중 어지럽고 피곤하다는 말에 드라이브만 하고 귀가했다. ( 그 얼마전 이란것도 따져보면 거의 십년전이다.)


아버지 요양원 비오는 어린이날 빙문하다.


기술 문명은 눈부시게 발전해 인공지능이 사람이 하는일을 하나둘 대처해가고 있다. 그림도 그리고 동영상도 만들어 낸다. 과거에 꿈꾸던 모든것들이 형식상으론 다 이루어지고 있는듯 보이는데 삶은 점점 불안하고 행복의 느낌은 점점 메말라 간다.


https://www.youtube.com/live/R9JOrLcwlQc?si=jZMuU9jyVwI3xYal


누차 경고한대로 대자연의 보복이 날로 강도를 더해간다. 생태계 전반에 걸친 생존의 위기가 점점 조여오고 있음을 전 인류가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나날들이다. 1984, 1999, 2012.. 등등 막연한 미래의 불안감이 그나마 낭만이었던 거다.


고양이 가출을 막기위해 원천차단 펜스를 설치했다. 녀석의 원망에도 이제 길양이 암컷을 쫒아 가출하는 사고는 벌어지지 않을것이다.


마무리 라는것은 항상 피날레 준비를 하며 벌려논것들을 정리해야 함을 말한다. 과거처럼 단순한 시대적 낭만으로 흘려보낼 시대가 아니란 것이다.


대세를 바꿀수 없고 생각한대로 세상이 흘러갈땐 말도 신중 글도 신중이다. 자칫 삐끗하면 여러모로 꼬이게 된다. 살짝만 어긋나도 그것에 따르는 파장과 카르마가 어디까지 뻗을지 아무도 장담못한다.  (오랜 인연에  대한 회상이 뜬금없이 36년만에 대학 동창회가 되서 그것도 시골 구석탱이 집근처에서 번개로 눈앞에 펼쳐진다.)  


원하는것을 얻으려 할땐 이루어지지 않음 또한 다행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검도에서 진검으로 연습 대련을 해선 안되듯 최소한의 안전지대 확보를 위해 욕망과 충동을 자제할줄 알아야 큰 사고를 줄인다. 명사수가 촛점 안 맞는 총을 애용하고 검술의 달인일수록 날이 없거나 부러진 검을 들고 다니는것도 같은 이유다. 대세의 흐름을 바꿀수는 없어도 사고 리스크를 최소로 줄이려 함이다.


난세의 혼란에 나대고 휩쓸리기 보다는 가급적 소소한 행복감을 찾는것이 좋다. 험한 세상에선 안전망이 구속이 아님을 실감하게 될것이다. 지금이 그런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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