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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찬 이규봉 Jul 27. 2021

11. 공집합과 무소유

아무것도없는 공집합, 비워야 행복하다

행복의 길


   행복이란 무엇인가? 한자로는 다행 행과 복 복 자를 써서 ‘幸福’이라 쓰고 영어로는 ‘Happiness’라고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행복이란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낀 상태’라고 한다. 그러면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는가? 여러분은 돈 많고 권력을 가진 자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나? 돈이 엄청 많은 부자는 정말 행복할까? 2020년에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 삼가 조의를 표한다. 한편에서는 그가 경제적으로 나라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노동자들을 착취했다고 비난한다. 모든 평가는 양면성이 있으니 판단은 순전히 개인의 몫이다. 재산이 엄청나게 많으니 상속세도 엄청나게 많이 내야 한다. 상속세의 방편으로 그가 갖고 있던 고가의 미술품들을 사회에 기부한다고 하여 어디에 기념관을 짓는지 갖고 설왕설래하다가 결국 서울에 짓기로 했다. 각 지방자치단체장들은 헛물만 들이킨 셈이다. 언제까지 중앙 집중으로 갈건가? 언제까지 지방을 들러리로 삼을 건가? 

   참으로 고인에게 아쉬움을 느낀다. 그 많은 재산을 살아생전에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凡使奴僕 先念飢寒’[7장 참조]하는 마음으로 베풀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그를 칭송하였을까? 그는 정말 그 많은 재산을 가져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돈과 권력을 갖고 있었으니 말이다. 돈 많은 부자(富者)보다는 비록 돈은 별로 없지만 다정한 부자(父子)가 더 행복하지 않을까?

   행복은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낀 상태’라고 했으니, 일단 행복하려면 우선 만족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그것은 사랑받는 길이다. 사랑받는 것을 느끼면 행복하지 않을까? 그래서 행복의 길에는 ‘사랑받는 길’과 ‘만족하는 길’ 두 가지의 길이 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다. 개신교에서 부르는 복음성가로 만들어졌지만 많은 인기를 얻어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받고 있지요.


   우리 어느 누구도 천대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고 모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이다. 정말이지 우리 사람들을 포함해서 이 자연의 모든 동식물의 탄생은 축하받아 마땅하다. 새로운 탄생은 너무도 신비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당사자는 당연히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내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나와는 전혀 관계없이 남이 주는 것이다. 살아가면서도 사랑은 남한테 받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남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얻어야 할 것은 만족하는 길만 남는다.

   그러면 만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똑같은 것을 얻고도 느끼는 작은 만족과 큰 만족은 누가 만드는 걸까? 우선 만족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사전적 의미로는 ‘마음에 흡족함’ 또는 ‘모자람이 없이 충분하고 넉넉함’이다. 모자람이 없다는 것은 그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 기준은 누가 정할까?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너무 많이 필요하면 그것을 다 채워야 만족한다는 것이고, 별 필요한 것이 없으면 더 채울 필요 없이 늘 행복하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행복을 느끼는 척도를 수학의 식으로 세워보면 아래와 같이 아주 단순하다.


가진 것/갖고 싶은 것


즉, 내가 갖고 싶은 것이 많으면 그만큼 많이 가져야 행복의 척도가 커지고, 반대로 내가 갖고 싶은 것이 적으면 적게 가져도 행복하게 된다. 꼭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다. 정신적인 것도 물론 포함한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일정할 때 더 원하는 마음이 없을수록, 즉 0에 가까울수록 너무너무 행복해지나, 원하는 마음이 더욱더 커질수록 행복의 강도는 점점 작아져 불행해진다. 아닌가? 너무 많은 것을 갖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무소유


   인도의 자이나교(Jainism)는 승려들은 옷도 걸치고 있지 않을 정도로 무소유를 실천할 뿐 아니라 앉을 때도 벌레 하나 죽이지 않을 정도로 조심히 앉는다. 단지 그들이 가진 것이 거의 없다고 그들은 불행하다고 느낄까? 법정스님(1932~2010)은 당신의 책에서 나오는 인세를 거의 모두 기부했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요정 정치의 대명사라 불린 엄청난 재산 가치가 있는  요정 대원각을 몇 번의 고사 끝에 결국 기부받았으나 길상사란 절로 바꾸고 조계종에 헌납하였다. 법정은 실질적으로 소유한 것이 거의 없이 생활하시다 돌아가셨다. 그는 별로 소유한 것이 없어 불행하게 사셨을까? 앞서 언급한 엄청 많이 소유한 그 부자와 비교해볼 때 이들은  더 불행했을까?

   법정스님께선 생전에 많은 책을 저술해 많은 중생에게 따뜻한 감정을 불어놓으셨다. 스님을 대표하는 책이 <무소유>다. 1976년에 초판이 나와 지금까지 가장 많이 읽힌 책이다. 필자도 대학생 시절 처음 이 책을 접했고 지금도 간간히 꺼내 보곤 한다. 이 책에서 스님은 어느 날 길을 떠나는데 갑자기 집에서 기르던 값비싼 난초를 아침에 양지바른 곳에 잠깐 내놓은 것이 생각나 되돌아왔다고 한다. 난초는 오랫동안 햇빛을 받으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깨달은 바 그 난초를 남에게 주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 법정, <무소유>, 범우사, 2010, 22쪽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가지면 오히려 불편을 초래한다는 스님의 말씀이다. 대표적인 것이 재물이 아닐까 한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재물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재물을 가능한 많이 갖고 쌓아두고 후손에게까지 물려주려고 한다. 오죽하면 새해 인사로 ‘부자 되세요’ 하는 말이 나왔겠는가? 분명 여기서 ‘부자’란 재물을 뜻함이지 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필요해서 재물을 갖게 되지만 너무 많은 재물을 쌓아두면 재물을 지켜야 하는 등 재물에 오히려 노예가 되어 인성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 현재 많이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도 그렇다. 너무 편리해서 스마트폰을 갖고 있지만 잠시도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이는 이미 중독된 것이다. 스마트폰의 주인이 아닌 노예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것을 주객전도라 한다. 집착은 바로 주인인 내가 그 대상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다 싶으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마음이다.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평온해진다. 돈에 집착하지 않고,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그리고 물건에 집착하지 않는 등 일체 집착을 끊는 마음이 무소유를 실천하는 마음이다.


버리면 얻는다


   법정스님이 수학의 한 분야인 집합에 대해 잘 알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이 말한 ‘무소유’는 18세기 칸토어에 의해 새로 발견된 집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집합이라 하면 명확한 대상들의 모임을 말한다. ‘사람들의 모임’ 역시 집합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명확함이란 참과 거짓이 분명한 것을 말한다. ‘사람들의 모임’은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이 명확하므로 집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키 큰 사람들의 모임’ 하면 집합이 될 수 없다. 키가 크다는 의미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에 주민으로 등록한 사람을 서울 시민, 대전에 주민으로 등록한 사람을 대전 시민이라고 하듯이 집합에 속한 대상을 그 집합의 원소라고 한다. 즉 우리는 사람이므로 우리 각자는 ‘사람들의 모임’에 속한 원소가 된다. 

   우리나라에는 무인도가 많다. 무인도는 말 그대로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무인도는 인천의 덕적도에서 남서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선갑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선갑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은 집합이 될 수 있는가? 물론 집합이 될 수 있다. 명제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집합 ‘선갑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의 원소는 무엇인가? 아무도 살고 있지 않으니 원소는 없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5보다 크고 3보다 작은 수의 집합에 속하는 수는 무얼까? 아무것도 없다. 이처럼 아무 원소도 갖고 있지 않은 집합을 공집합이라고 한다. 수학에서는 공집합을 기호로 ∅라고 나타낸다. 

   바로 이 공집합이 법정스님이 말하는 무소유 그 자체이다.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공집합은 무척 자유롭고 어디에든 포함되어 있고 누구도 배척하지 않는다. 있어도 있는 둥 마는 둥이며 일체 간섭도 하지 않고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모두를 없애 버릴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있다. 정말?

   한 집합 A가 다른 집합 B에 포함된다는 것은 “A에 있는 모든 원소가 모두 B에 있다”는 뜻이거나 또는 “B에 없는 원소는 A에도 없다”는 뜻이다. 이 경우 기호로 A⊂B로 나타내며 A는 B의 부분집합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여자들의 모임’은 ‘사람들의 모임’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여자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는 사람이 아니라면 당연히 여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둘 중 어느 것도 참이므로 


여자들의 모임 ⊂ 사람들의 모임


이 성립한다.

   임의의 집합 X가 있다고 하자. 만일 어떤 것이 X에 없다고 하면 그 어떤 것은 공집합에 있을까? 당연히 없다. 왜냐하면 공집합은 어떠한 원소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X에 없으면 ∅에도 없다’가 성립한다. 그러므로 공집합은 X에 포함됨을 알 수 있다. 즉 모든 집합 X에 대하여


∅⊂X


가 된다. 공집합 ∅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모든 곳에 다 포함된다. 즉 자신을 비우면 모든 것에 다 들어갈 수 있고 그 어떤 것도 공집합을 배척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공집합 ∅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어떤 것과 합해도 그것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있는 둥 마는 둥이다. 이것을 기호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X⊂X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공집합에서 조차 무엇인가를 취하려고 한다면 공집합은 그것을 자기처럼 만들어 버린다. 즉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없애버린다. 이것을 기호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X=∅


이처럼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공집합은 어디에든 포함되어 있고 아무도 해치지 않지만 모든 것을 한 번에 날려버리는 매우 큰 힘도 갖고 있다. 이는 아무것도 갖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바로 법정스님이 말한 그 무소유를 대표한다.

비어야 쓸모 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란 말이 있다. 본래부터 있었던 물건은 없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갈 때도 역시 빈손으로 간다는 것이다. 법정스님은 “괴로움은 집착에서 온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라며 말한다. 영원히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총각에게 “왜 그렇게 혼자 사나?”하고 그 이유를 물으니 “나에게 여자가 없으니 이 세상 모든 여자가 내 여자 아닌가?”라고 답한다. 노숙자에게 “왜 집이 없이 노숙하고 지내나?”라고 물으니 “내가 가진 땅과 집이 없으니 이 세상 땅과 집이 다 내 것이 아니겠는가?”라며 답한다. 마치 이들은 이미 무소유의 개념을 아는 것 같다.

   법정스님은 우리가 무엇을 갖는다는 것은 한편 소유당하는 것이며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질 때 우리들의 정신은 그만큼 부담스러우며 그것을 갖지 못한 이웃에게 시기심과 질투와 대립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또한 잃는다는 것이 잘못된 것도 나쁜 것만도 아니다 라고 말한다. 때로는 잃지 않고는 얻을 수가 없다. 크게 버릴 줄 아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 전체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이든지 차지하고 채우려고만 하면 사람은 거칠어지고 무디어진다. 맑은 바람이 지나갈 여백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함께 사는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 몫을 더 차지하려고 채우려고만 하기 때문에 갈등과 모순과 비리로 얽혀 있다. 개인이나 집단이 정서가 불안정해서 삶의 진실과 그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모습니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차지하고 채우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침체되고 묵은 과거의 늪에 갇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차지하고 채웠다가도 한 생각 돌이켜 미련 없이 선뜻 버리고 비우는 것은 새로운 삶으로 열리는 통로다.“

- 법정, <버리고 떠나기>, 샘터, 1993, 233-234쪽


   이것이 바로 공집합의 본질이다. 공집합은 자신이 완전히 비워 있으므로 그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동양화의 산수화를 보면 서양화와 달리 비움으로 돋보임을 알 수 있다. 흰 여백이 많은 가운데 붓의 검은색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여백이 없는 그림은 더 이상 동양화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50대에 들어서 우리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전통악기인 피리를 연주하다 보니 다양한 분야의 음악을 피리로 연주하게 됐다. 아울러 이론을 공부하면서 서로 연관이 있는 우리 음악 전반에 걸쳐 공부하고 있다. 젊어서 멀리하던 우리 음악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우리 음악에는 비어 있음이 기본으로 깔려 있다. 연주할 때는 장구나 북이 장단을 친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중모리 장단을 예로 들어보자. 중모리 장단은 12박으로 ‘덩궁따 궁따따 궁궁척 궁궁궁’과 같이 친다. 하지만 연주할 때 이 12박을 모두 치지는 않는다. 피리로 서양음악의 재즈와 같은 산조를 연주한다고 하자. 연주하는 중에 12박을 모두 친다면 연주자의 선율이 북소리에 감추어질 것이고 따라서 청중은 피리 가락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다. 따라서 연주자도, 북소리도 그리고 감상하는 청중도 모두 만족하기 어렵다. 그래서 북을 치는 사람(고수라 한다)은 피리 연주자의 가락을 들으면서 적재적소에 추임새를 넣어주거나 박을 쳐주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박을 다 치지 않고 자꾸 덜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연주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고수가 아무리 멋지게 장단을 칠 줄 알더라도 주연인 피리의 연주를 살리기 위해 감추다가 피리 가락이 길게 뽑아질 때 어쩌다 한번 멋진 가락을 살짝 보여주는 것이다. 또는 연주자가 한 박을 쉴 때 쿵 하고 소리를 야무지게 한번 내주는 그 자체가 또한 멋이요 기량이다. 이것이 바로 비어있기에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움의 쓸모를 말한다.[노자 제11장]


   서른 개의 바큇살이 바퀴통에 연결돼 있어도 비어 있어야 수레가 된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어도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창과 문을 내어 방을 만들어도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그런고로 사물의 존재는 비어있음으로 쓸모가 있는 것이다.

빈 마음은 행복의 지름길이다


   공집합뿐만 아니라 수에 있어서 ‘0’도 무소유를 상징한다. ‘0’이란 아무것도 갖고 있는 것이 없는 수이다. 즉 비어 있는 것이다. ‘0’은 인도의 상인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그것이 수로 인정되기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0’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아 어느 수에 더해도 영향을 주지 않지만 독을 품으면 곱하기(x)라는 연산자로 모든 수를 일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다.

   우리가 행복함을 느끼는 것은 만족스러운 마음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만족은 어디서 나오는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갖고 있을 때 나올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많은데 갖고 있는 것이 없다면 그만큼 불만스러울 것이다. 이것을 수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나타낼 수 있다.


만족 = 소유/원함


여기서의 원함은 물질적인 것은 물론 정신적인 것도 포함한다. 원하는 것이 많을수록 만족 지수를 높이려면 그만큼 소유해야 한다. 롤링스톤즈(The Rolling Stones)가 <원하는 것을 항상 다 가질 수는 없다(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라는 노래를 부르며 외쳤듯이 원하는 것을 다 갖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원하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만족 지수는 높아진다. 원하는 것이 없다면 즉 ‘0’이라면 만족 지수는 최대가 된다. 인도의 자이나교 승려들을 보라. 그들은 옷조차도 몸에 걸치지 않는다. 많이 갖고 있는 우리는 그들보다 행복할까?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의 사람보다는 낮은 나라의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높다는 것을 아는가? 결국 우리의 행복은 비우는 데 있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우는 것을 두려워한다. 잃은 것 같고 놓치는 것 같고 없어지는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많이 비워져 있는 그릇이 큰 그릇이고 많이 비워 있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가르친다. 비운만큼 많이 채울 수 있고 많이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움을 실천하는 길은 무엇일까? 물질적으로 많이 갖지 않음도 중요하지만 실은 정신적인 비움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법정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혼자 있음을 중요시했다.


   “홀로 있는 시간은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이다. 홀로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해라. 그렇지 못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맹목적인 겉치레의 흐름에 표류하고 만다. 홀로 있어야만 벌거벗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성찰할 수 있다. 이래서 고독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만드는 귀중한 시간이다.” 

- 법정, <버리고 떠나기>, 샘터, 1993, 200쪽


   홀로 있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을 통해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인디언들이 미국인과 조약을 맺으면서 한 말을 담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을 보면, 자연을 사랑하고 절대자를 숭배하며 인간의 생명뿐 아니라 모든 자연의 생명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고귀한 이상을 볼 수 있다. 자칭 문명인이라고 하며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인인 미국인들이 인디언을 야만인이며 이교도라고 하여 그들의 땅을 강제로 탈취하고 학살을 했다. 자연을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아메리카 인디언과 강력한 무기를 가졌다고 그들을 마구잡이로 살생하고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은 미국인 중 누가 야만인일까?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현대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홀로서기를 시켰고, 명상을 하게 하여 홀로 깨닫게 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자신의 땅을 침략해 자신들을 내쫓고 자신들을 거의 멸종시키고 강제로 약속을 해 놓고도 지키지 않는 미국인들에게 한 그 주옥같은 말을 들어보면 홀로 있게 하는 그들의 교육방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묵연 스님은 <빈 마음 그것은 삶의 완성입니다>라는 시를 통해 아무것도 갖지 않은 공집합의 본질을 잘 말해준다. 


   빈 방이 정갈합니다.

   빈 하늘이 무한이 넓습니다.

   빈 잔이라야 물을 담고

   빈 가슴이래야 욕심이 아니게

   당신을 안을 수 있습니다. 


   비어야 깨끗하고 비어야 투명하며

   비어야 맑디 맑습니다.

   그리고 또 비어야만 아름답습니다.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빈 마음이 좋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비워지지 않아서

   산다는 일이 한없이 고달픈 것입니다 


   터어엉빈 그 마음이라야

   인생의 

   수고로운 짐을 벗는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라야만 당신과 나 

   이해와 갈등의 어둠을 뚫고

   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빈 마음 그것은 삶에 완성입니다 


행복방정식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은 갖고 싶은 것을 줄여야 하는 것이다. 즉 갖고자 하는 욕심을 가능한 버려야 그런대로 만족감을 느끼며 살 수 있다. 대전에 있는 배재대학교의 뒷산인 도솔산에는 자그마한 암자 내원사가 있다. 산책을 하면서 자주 들리는 곳이다. 이 절의 벽면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승리가 좋다지만 원한을 가져오고 패한 자 괴로워서 오늘도 누워있네.

    이기고 지는 마음 영원히 녹아지면 다툼은 없어지고 저절로 편해지리.

    허공에 비친 저 달 그림자 자취 없듯이 이 세상 어느 것을 영원하다 하리오.

    덧없는 고개에서 이 고요 찾아보니 태평가 장단 맞춰 너울너울 춤을 추네.

    만족을 아는 사람 땅 위에 누웠어도 편안하지만 

 분수를 모르는 자 천당에 있더라도 편하지 아니하네.

    만족을 못 느끼면 재산이 많더라도 가난함이요, 

 분수를 지키는 자는 가난하더라도 부자 마음이라오.


만족을 아는 사람은 편안하고 마음이 풍요롭다는 말이다. 스콧 니어링은 삶에서 정말 중요한 건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라 하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다고 한다.

   오늘날과 같은 신자유주의가 활개를 치고 있는 사회에서는 기업마다 새로 만드는 상품을 사게 하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그 전략이란 기술 발전에 따라 기존 제품을 폐기하게 하고, 광고와 유행을 따르게 하여 아직 유용한 물건을 버리게 하며, 그리고 오래 사용하게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으로 수명을 제한하는 기술을 제품에 도입하는 것이다.

   우리가 많이 가지려면? 많이 만들어야 하고, 많이 일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많이 소비하면 할수록 그만큼 삶을 낭비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의 생태계가 많이 훼손되고 쓰레기도 많이 생산되어 우리의 후손은 그 뒤처리를 하느라 결코 잘 살 수 없게 된다. 아래 그림은 1901년부터 지금까지 꺼지지 않고 켜있는 4와트짜리 필라멘트 전구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전구라고 한다. 이 전구가 120년 넘게 사용할 수 있다면 다른 제품들도 충분히 수명을 오래 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수명이 오래가는 제품을 만들면 상품이 순조롭게 회전이 안 되어 기업은 지속 가능해지기 힘들다.

   오직 소비만을 촉진시켜 최고의 이익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는 모든 공동체적 원리를 소멸시키고 끝없는 경쟁과 그에 동반되는 비교를 강요함으로써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궁핍하게 만든다. 행복해지기 위해 소비하고 있지만 동시에 아무리 소비해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더 많은 소득을 갈망하며 발버둥 치게 만든다. 소비를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간직한 채 사람들은 무한경쟁 속에 내던져지게 된다. 과잉생산을 하면 할수록 그 결과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인간은 물건을 소비하며 삶을 낭비하게 되며 그로 인한 쓰레기는 곳곳에 넘쳐나게 될 뿐이다.

   부자(富者)는 물질적으로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더 필요한 것이 없는 자이다. 더 필요한 것이 없으면 없을수록 더 부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행복의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행복 = 가진 것/갖고 싶은 것


도교의 태상감응 편에 보면 禍福無門 惟人自招(화복무문 유인자초)라고 한다. 즉 화와 복은 들어오는 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란 뜻이다. 우리가 많이 가지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화를 자초할 수 있다. 화가 들면 행복해질 수 없다.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바라는 것이 적어야 한다. 그러면 대신 우리는 여유가 많아지고, 그래서 자유롭게 살며 활동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모두 행복해지려면 남자보다는 여자가 행복해야 하고, 여자보다는 아이가 행복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대체로 아이가 행복하면 엄마가 행복하고, 아내가 행복하면 남편도 행복해진다. 행복한 가정은 행복한 사회를 만들고 아름다운 나라를 만든다. 따라서 엄마는 아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부부도 서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사회는 아름답게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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