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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찬 이규봉 Aug 28. 2023

육사 교정의 독립군 흉상 철거

육사의 정통성을 신흥무관학교에 두어야 한다

대한민국 육군 장교를 배출하는 육군사관학교의 뿌리는 어디일까? 우리 국군의 뿌리는 어디일까? 보통의 상식을 갖고 일제강점기 시대의 독립운동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사상을 떠나 당연히 신흥무관학교이고 광복군이라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육사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다.     


조선말 이회영 6형제와 이상룡 등이 가산을 처분하고 서간도로 망명하여 1911년 6월에 그곳에서 ‘신흥무관학교(원명은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대한제국무관학교 출신들이 무관교육을 맡았으며 3‧1 운동 후 지청천이 최신 병서와 군용 지도를 가져오고 이범석 등이 합류하면서 활기를 띠고 명성이 높아졌다. 청산리전투 승리 후 경신대학살이 일어나면서 1920년에 폐교되었으나 3500여 명에 이르는 졸업생은 만주와 중국 대륙 각지에서 일본군과 전쟁을 치렀다.      


이처럼 많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독립군에서 주요 간부로 활약했으며 광복군 창설의 주축이 되었다. 광복군은 임시정부 산하에 있었고 실질적으로 일본군과 전쟁을 벌였다. 멀리 동남아까지 가서도 전쟁을 했고 가까이는 장준하 선생을 포함한 광복군들이 한반도에 침투하는 특공대 훈련까지 끝내고 침투하려 했었다.  

   

식민지 시대를 겪고 광복을 맞은 나라라면 당연히 일본군에 저항한 역사를 자랑스럽게 알고 계승해야 마땅하나, 조선을 적국으로 생각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친일파들은 수많은 독립군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냥하였고 그 대가로 친일파가 활개 치는 새로운 세상을 다시 만들었다. 국군과 육군사관학교 창설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이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거의 다 일본군 출신으로 일왕에게 충성하며 적극적으로 친일을 한 자들이다.     

그동안 민주 정부가 여러 번 들어섰으나 육사의 뿌리는 바뀌지 않았다. 2011년 이전 육사의 홈페이지의 연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 1946년 5월 1일에 육군사관학교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조선경비사관학교가 제1기생 88명으로 개교하였고...... 육사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45년 12월 5일에 문을 연 군사영어학교와도 관계가 깊다....... 건군 사업의 첫 발걸음으로 국방사령부가 설치된 뒤에 부각된 당면 과제는 군 간부 양성 문제였다. 사설 및 유사 군사단체와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등에서 경력을 쌓은 수많은 자원들이 있었지만 제각기 다른 군사적 배경과 경력을 가진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통일된 교육을 실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당시의 군 당국은 미국식 군사제도와 교리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후...... 학교장 미군 리스 소령, 부교장 원용덕 참령 아래 한국과 미국 양국인으로 구성된 교관단이 편성되어 선발된 60명을 대상으로......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2월 27일 태릉으로 이전하여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창설과 더불어 폐교될 때까지 약 110명(일본육사출신 12명, 학병출신 72명, 지원병출신 6명, 만주군출신 18명, 중국군출신 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군사영어학교가 해체된 이튿날인 1946년 5월 1일 군사영어학교에서 임관하지 못한 학생 60명과 경비대 각 연대의 사병 중에서 2~3명씩 선발된 28명 등 모두 88명을 제1기생으로 하여 조선경비사관학교가 개교하였다. 오늘날 육군사관학교의 개교기념일이 5월 1일로 된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초대 교장으로 이형근 참령이 취임하였다. 조선경비사관학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즉 1948년 9월 5일, 국군의 창설과 동시에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면서......


그 어느 곳에서도 항일무장투쟁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구절이 없다. 식민지배를 받았고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나라치고 군 장교를 배출하는 사관학교에서 자랑스러운 독립무장투쟁의 역사와 정통성을 배우지 않는 나라가 있던가?     


이처럼 국군과 육사의 정통성을 ‘일제와의 항쟁’에 두지 않는 한 이러한 사태는 정권에 따라 반복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과거 민주당 정부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육사와 국군의 정통성을 항일운동의 모체인 신흥무관학교와 광복군에 둠으로써 정권에 따라 변하지 않는 영속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여, 국군과 장교들이 민족을 위하여 봉사한다는 마음을 갖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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