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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찬 이규봉 Aug 16. 2024

군 교재에 독립영웅이 빠진 것은 당연한 결과

군은 그 정통성이 친일파에 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처음으로 광복절 행사가 친일 세력의 준동으로 인해 두 곳으로 나뉘어 치러지면서 국민 모두의 잔치가 아닌 진영 간의 대결 국면을 야기했다. 해방 이후 이처럼 친일 세력이 본격적으로 나서며 자신들의 세를 과시한 것은 유래가 없는 일이다. 새로운 정부가 친일의 색채를 보이자 그동안 한풀이라도 하듯 곳곳에서 충돌을 일으키며 심지어는 식민지 사관에 의한 역사 왜곡을 서슴지 않는다.     


그동안의 친일 행각은 늘 있었지만 대놓고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잔불을 정리하지 않고 놔두면 바람과 함께 점차 커지듯, 친일파의 잔재를 놔둔 결과 매국의 행위로 얻은 재력과 권력을 지닌 그들은 정권을 장악했고, 그 힘을 이용하여 평소 자신들의 소신대로 식민지 사관에 입각한 역사로 왜곡하고 있다. 요지는 “자신들은 앞을 내다본 선지자이고 독립군들은 앞을 잘못 내다본 무지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소신대로 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 정권 창출 2년 동안 주요 역사 관련 단체의 장들을 모두 친정권 인사로 바꾸고, 홍범도, 김좌진 등 독립영웅을 육사 교정에서 없애려 했다. 정권 연장을 위한 언론의 완전 장악이 필요해 무리수를 두어가며 공영방송을 장악하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국방부는 군 장병을 교육시키는 교재에 독립영웅들의 이름을 제외시켜 독립운동의 뿌리조차 말살하려 하고 있다.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 사회는 해방 이후 단 한 번도 친일 부역자들을 처단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를 거쳐 부와 권력을 가진 그들이 오히려 이 사회의 기득권이 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독립군과 많은 그 후예들은 해방 후에도 친일 정권에 빌붙어 자신들의 이익을 얻기 위해 친일 부역자들이 사회의 단단한 기득권이 되는 데 일조했다.     


친일 부역자들이 큰 힘을 갖게 한 많은 요소 중에 특히 다음 두 가지는 우리 사회와 정치권도 잘 알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국토방위의 근간이 되는 국군의 뿌리를 항일투쟁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로 치부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부 항일운동가들을 용공분자로 몰고 적으로 삼아 친일파들이 독립군을 처단하는 명분을 준 것이다. 현재 국군의 날 ‘10월 1일’은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삼팔선으로 진격한 날짜로 항일투쟁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장교를 양성하는 모태인 육군사관학교의 뿌리는 독립운동과는 전혀 관련 없는 미군사영어학교이다. 우리 사회는 남북의 분단을 이용해 친일파가 생존을 위하여 많은 독립군을 제물로 삼은 것을 문제 삼지 않고 용인했다. 그 결과 국군은 마구잡이로 빨갱이 몰이를 하며 전국에 수도 없이 많은 선량한 주민을 학살했고 두 번이나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우리는 나라를 빼앗겨 일제강점기를 거친 민족이다. 그러므로 육군 장교를 배출하는 육군사관학교에서는 당연히 항일무장투쟁사를 배울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항일무장투쟁의 초석이 되는 신흥무관학교가 육사의 뿌리이고, 광복군이 국군의 뿌리라는 것은 보통의 상식을 갖고 일제강점기 시대의 독립운동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육사에서는 항일무장투쟁사를 가르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국군을 창설한 자들이 거의 다 독립군을 적으로 보고 일왕을 위해 싸운 적극적 친일파인 일본 장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은 그 정통성이 친일파에 있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를 겪고 광복을 맞은 나라라면 당연히 일본군에 저항한 역사를 자랑스럽게 알고 계승해야 마땅하나, 조선을 적국으로 본 미국이 지원한 친일파들은 수많은 독립군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냥하여 이 사회는 친일파가 활개 치게 되었다. 2011년 이전 기록된 육사 홈페이지의 연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 1946년 5월 1일에 육군사관학교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조선경비사관학교가 제1기생 88명으로 개교하였고 ...... 육사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45년 12월 5일에 문을 연 군사영어학교와도 관계가 깊다. ...... 건군 사업의 첫 발걸음으로 국방사령부가 설치된 뒤에 부각된 당면 과제는 군 간부 양성 문제였다. 사설 및 유사 군사단체와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등에서 경력을 쌓은 수많은 자원들이 있었지만 제각기 다른 군사적 배경과 경력을 가진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통일된 교육을 실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당시의 군 당국은 미국식 군사제도와 교리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후 ...... 학교장 미군 리스 소령, 부교장 원용덕 참령 아래 한국과 미국 양국인으로 구성된 교관단이 편성되어 선발된 60명을 대상으로 ......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2월 27일 태릉으로 이전하여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창설과 더불어 폐교될 때까지 약 110명(일본육사출신 12명, 학병출신 72명, 지원병출신 6명, 만주군출신 18명, 중국군출신 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 

   군사영어학교가 해체된 이튿날인 1946년 5월 1일 군사영어학교에서 임관하지 못한 학생 60명과 경비대 각 연대의 사병 중에서 2~3명씩 선발된 28명 등 모두 88명을 제1기생으로 하여 조선경비사관학교가 개교하였다. 오늘날 육군사관학교의 개교기념일이 5월 1일로 된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초대 교장으로 이형근 참령이 취임하였다. 조선경비사관학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즉 1948년 9월 5일, 국군의 창설과 동시에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면서 ......     


그 어느 곳에서도 항일무장투쟁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구절이 없다. 이처럼 국군과 육사의 정통성을 ‘일제와의 항쟁’에 두지 않는 한 매국적인 행위는 정권에 따라 반복될 수 있다. 정권이 바뀌는 날이 온다면 반드시 이 두 가지는 바꾸어야 한다. 하나는 육사의 뿌리를 항일운동의 모체인 신흥무관학교에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인 ‘9월 17일’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국군의 정통성을 항일운동에 두어야 더 이상 정권에 따라 변하지 않고 오직 민족을 위하는 국군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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