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을 향유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어떻게 하는 걸까. 저녁놀을 바라보며 우울을 와인잔에 담아 마시는 상상을 했다. 나름 괜찮아 보인다. 나도 해보고 싶다. 우울에 관한 책을 읽어보기도 하고, 우울증을 치료했다는 친구에게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정말 우울하면 우울하다는 소리도 안 나와.
친구의 말을 곱씹었다. 책에서 우울을 우울이라 부를 수 있으면 우울하지 않다.라는 문장도 곱씹었다.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우울하지 않아서 우울하다고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감정들은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혹시 모두가 우울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책과 주변인들의 눈치를 보느라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등학생 시절 매일 시를 10~20편 필사했었다. 필사는 단순히 시를 옮겨 적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시를 내 안에 밀랍 하는 작업이었다. 엄지 손가락에 생긴 굳은살을 만지면 기분이 좋았다. 필사한 모든 시가 기억에 남지는 않았지만 굳은살 안에는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우울을 이야기하고 쓰는 일은 우울을 외부에 밀랍 해두는 일이다. 그래서 쓰거나 말하고 나면 공허해지는 것이다. 우울이 빠져나간 자리를 위해 글을 쓰고 나면 맛있는 것을 먹기로 했다. 임시방편이라고 해도 즐거운 감정이 채워지면, 우울을 막진 못해도 오는 속도를 늦출 수는 있을 거라 믿는다.
밀랍 된 우울을 하나 프린트해 본다. 배척당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객관화된 우울은 이렇게 징그럽구나.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린다. 종이에서 나는 것일까, 내게서 나는 것일까. 글을 읽는 대신 쓰다듬는다. 칭얼거리는 아기에게 대하듯 그만 잠에 들라고.
우울을 써놓고는 우울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구나. 마음 한 편에서 비아냥이 들린다. 쓴다. 쓰면서 너도 밀랍 시켜줄게 조금만 참아. 중얼거린다. 쓰고 나서 쿠키를 먹기 위해. 모든 우울을 털어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쿠키는 먹을 것이다. 멈추지 않을 것이다.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