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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매영 Jun 26. 2024

빈 잔을 들고 마시는 척을 했다.

 어제는 오랜만에 카페를 다녀왔다. 아포가토를 먹으며 글을 읽었다. 낯선 삶들을 거닐면서 금세 아포가토를 다 먹었다. 카페에는 글을 쓰려고 갔다.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음료를 다 먹어버리는 것은 내 고질병이다. 여유롭게 아메리카노를 음미하며 글을 쓰는 사람을 선망한 적이 있었다. 항상 음료나 음식이 앞에 있으면 탐하고 빨리 먹어치우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먹고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것처럼 빨리 먹고 도망가지 않으면 누군가 쫓아올 것처럼 그랬다.


 어릴 때에는 무언가 쓰기 전에 잠을 조금 잤어야 했다. 꿈과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백일장에서도 대학 실기 날에도 글을 쓰기 전에 조금 잤었다. 자고 나면 글이 잘 쓰였다. 진짜 나는 꿈에 있는 게 아닐까 의심까지 들었지. 자는 일은 도망가고 싶어 하는 나를 꿈 안에 가두고 글을 쓰는 나를 불러내는 빙의 같은 게 아니었을까.


 언젠가 내 삶이 제일 고통스럽고 나락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가 타인에게 무심한 것은 통점이 상한선을 돌파해 그런 것이 아닐까 싶은 적도 있었다. 마음이 가난해서 그렇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줄 정도로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자그마한 상처도 버거운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안다고 자만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내 안에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참 많이 발전했다.


  어릴 적에 그렇게 맞아도 시골에서 집 나간 강아지처럼 꼭 집에 들어갔다. 갈 곳이 마땅히 없었다. 길바닥에서 자더라도 집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집에 사랑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세상도 사랑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도망가도 결국 집으로 돌아갈 때 나는 어떤 생각을 했던 걸까. 나는 외로움을 몰랐다 애당초 외롭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 나는 포기를 몰랐다. 애당초 포기를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담담하지 않은 사람이 담담한 글을 쓴 것을 읽는다. 담담한 사람이 담담하지 않은 글을  것을 읽는다. 커튼을 걷어 김서린 유리창 너머를 보는 것 같다. 예전에는 뭐든 좋지 않았다. 좋은 문학 작품이라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나보다 괴로운 사람은 없다 생각해서 그랬다. 사실 조그마한 상처에도 이입되어 도망가기 바빴을 뿐이다.


 다양한 상처들을 더듬는다. 이제는 타인의 상처와 내 상처를 재지 않는다. 타인의 행복에 내 불행을 두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인다 해서 문제였다. 그럴 때면 보이지 않는 것을 인정하기로 한다. 세계와 세계가 부딪히면 블랙홀만 생겼다. 누군가의 글을 읽는 일은 그 사람의 세계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일이다. 내 궤도를 인정하고 당신의 궤도를 인정하는 일. 우리는 우리 세계에서 제일 아프고 제일 즐겁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을 이제는 조금은 할 줄 알게 된 것 같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걸까. 집에서 나와 그런 여유가 생긴 걸까. 여하튼 나쁘지 않다. 다음에 카페에 갈 때는 아메리카노를 마셔야겠다.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도록 노력해 봐야지. 뭐든 도망갈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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