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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매영 Feb 04. 2021

병원에서 시인을 만났다


 병원에 있으면 시가 줄줄 나올 줄 알았다. 거기다 다른 병도 아니고 릴케를 죽게 만들었다던 백혈병 아닌가.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같은 백혈병이라지만 나는 조매영이고 릴케는 릴케라는 것을.     


 처음 노인과 인사를 했을 때 나는 시를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소개했다. 노인은 자신도 시를 쓴다고 했다. 서정주 시인에게 추천을 받아 등단을 했다고 했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반가운 법이다. 그녀는 나를 반가워했다. 나도 그녀가 반가웠다. 자그마치 서정주 시인에게 추천받아 등단한 사람이라니 후광이 보이는 것 같았다. 초췌한 보호자의 모습은 어느 순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노인은 시를 쓴 것이 있으면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병원에서 쓴 시는 아직 없다고 말하며 자리를 피하고 말았었다.     


 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쓰지도 않고 시가 왜 나오지 않을까 괴로워했다. 도둑놈 심보였다. 서정주 시인에게 추천받아 등단한 사람에게 어설픈 시를 보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과거에 쓴 시를 보여주기에도 뭐했다. 며칠 동안 배선실에 가지 않았다.     


 결국 포기한 마음으로 배선실에 갔다. 쓰지 못했다고 이야기라도 하는 게 예의 같았다. 노인은 쉬고 있었다. 나를 반겨주었다. 시가 있냐고 묻지 않았다. 노인은 내게 다짜고짜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보이지 않는 동안 노인은 남편에게서 무엇을 본 걸까. 보호자들은 쉽사리 자신의 환자와 나를 동일시했다. 뭐가 미안하시냐고 물어보려는데 노인의 시선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햇빛이 베일처럼 노인의 얼굴을 덮었다. 꼭 기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은 기도가 끝난 듯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모든 일이 꿈같다는 눈이었다. 남편이 몸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해졌다고 한다. 역시 노인은 내게서 남편의 병을 보고 있었다. 


 노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시도 살아야 쓴다고 김수영 시인이 말한 것처럼 온몸으로 밀고 나가려면 머리도 심장도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노인의 남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말을 모두 창 밖에 놓아둔 것 같았다. 그냥 연신 미안하다고만 말했다. 

 나는 릴케도 김수영도 남편도 아니고 나일뿐인데. 그냥 못나서 시를 못 썼을 뿐인데.  시가 어려웠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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