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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들래 Oct 19. 2024

행복한 견생

십오 년 일 개월동안 고마워요, 사랑해요. 안녕!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점심을 먹고 용변이 목적인 산책을 나서려는데 뒷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어요. 걱정하는 아빠 얼굴이 역력했지만 어쩌겠어요. 뒷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걸요. 병원에서도 특별한 처방을 해줄 상황이 아니었어요. 열다섯 살 반려견 치리오는 사람 나이로 치면 노년이었니까요.

  그때부터 사십오일 동안 엄마의 품에 안긴 채, 바깥 구경을 하고 엄마가 갈아주는 기저귀를 찬 채 지냈어요. 산책을 못해서 슬펐지만 엄마 품에 머물 수 있어서 한편으론 행복했어요. 


  엄마는 영화를 좋아하죠. 영화로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일을 하거든요. 요즈음엔 영화로 치리오 마음을 치유해 주고 있어요. 엄마의 영화 파일에는 강아지와 관련된 영화가 열 편이 넘어요. 엄마가 가장 자주 보는 영화를 치리오도 가장 좋아합니다. 이심전심인 거죠. 그 영화가 뭐냐고요? 

  <하치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일본판과 미국판이 있는데 치리오는 일본판 하치를 조금 더 좋아해요. 동양권 영화라서 그런지 하치 마음에 더 공감이 갔거든요. 갑자기 죽은 주인을 찾아 매일 기차역 앞에서 기다리는 하치의 기다림의 끝은 언제일까요? 그 끝은 하치의 죽음이겠죠. 보면서 엄마도 치리오도 울었어요.

  엄마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개에게 처음 이름을 지어준 날>이란 영화를 보면서 치리오 이름이 탄생한 배경을 다시 추억했어요. 어언 십오 년간 치리오로 살아오면서 이름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거든요. 이름은 반려인에게도 반려견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죠. 치리오는 치리오 이름답게 지금껏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치 이름을 지어준 승아 누나와 승현 형아의 가족구성원으로 사랑받으면서요.

  장애가 있는 어린 소년을 치유해 준 강아지 '모야'가 등장하는 영화 <나의 특별한 힐링 친구>도 감동적이었어요. 반려견도 얼마든지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무엇보다 좋았죠. 

  애니메이션 영화 <언더독>을 보면서는 너무 슬펐어요. 엄마도 조용히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버림받은 개들의 이야기였으니 당연하죠.   


  이제 가족과 이별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십오 년이란 시간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어요. 이미 언급한 것 외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추억들이 많았어요.

  엄마 아빠와 함께 떠났던 양양과 양평에 있는 반려견 펜션 여행이 생각났습니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그쳤지만 많은 친구들을 만나서 뛰놀던 시간들이 행복했어요. 반려견 펜션답게 모든 시설이 반려견 우선이었죠. 쾌적한 목욕도 즐기고,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숨바꼭질한 것도 기억납니다. 무슨 숨바꼭질이냐고요? 의아해하던 엄마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어요. 맞아요, 엄마. 그때 나무 뒤에 치리오가 오래 숨어있었던 거 기억나죠. 잿빛 슈나우저가 나무 앞까지 왔다가 치리오를 못 찾고 돌아가는 거 봤잖아요. 갈색털이 유난히 아름다웠던 포메라니안에게 결국 들켰지만요. 그때 우리들은 재미있게 술래잡기를 하고 있던 거였어요. 

  객실에는 반려견에게 특화된 침대와 웰컴 셔츠, 그리고 간식도 준비되어 있었죠. 왠지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어요. 엄마 아빠 침대와 조금 떨어졌지만 침대가 높아서 엄마 아빠가 잘 보였어요. 

  펜션여행을 즐기던 치리오를 보고 그해 여러 차례 여행을 떠났죠. 늦가을 풍경이 아름답다는 반려견 동반 휴양림도 엄마가 어렵게 예약해서 데려갔어요. 휴양림 가기 전 광견병 예방접종 받을 땐 겁이 좀 났지만요. 아쉬웠던 건 반려인들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일까요. 그날 반려견 객실엔 우리 가족뿐이었습니다. 여러 친구들과 술래잡기 놀이를 즐기고 싶었거든요. 혼자서 할 수 있는 놀이가 아니라 쓸쓸해하는 치리오를 보고 아빠가 긴 산책을 시켜주었어요. 십일월 휴양림은 온통 울긋불긋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많은 친구들과 함께 감상할 수 있었다면 기뻤을 텐데 말이죠. 그저 치리오 두 눈에 멋진 풍경을 꾹꾹 눌러 담으며 마음을 달랠 수밖에요. 다음날 아침에 휴양림 산책을 다시 했는데 해 질 녘 산책과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어요. 요즈음엔 왠지 해 질 녘 산책에 마음이 더 가더라고요. 해가 저물듯 치리오의 삶도 저물어가고 있으니까요.


  엄마 친구들 만나서 함께 산책했던 것도 기억나요. 녹색 숲과 잘 어울리는 우아한 반려견이라고 했던 이모가 그랬죠. 치리오를 알고 나서 반려견에 대한 편견이 없어졌다고요. 좋은 가정 만난 치리오가 행복해 보인다고 했을 때, 무한 긍정의 눈길을 보냈는데 이모도 기억할까요? 

  냉정해 보였던 또 다른 이모가 개 키우는 건 부르주아의 상징이라고 했던 말도 기억해요. 개가 다 같은 개새끼지, 푸들이며 골든 리트리버며 슈나우저 같은 품종이 어딨냐고 흥분했죠. 순간 속상했지만 누구나 개를 좋아하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승아 누나와 승현 형아와 가족이 된 건 정말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죠.

  십오 년 노견일 때까지 별다른 병 없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유견일 때, 성견일 때, 노견일 때마다 사료를 항상 재정비해 준 엄마 아빠, 치리오 건강을 위해 충분한 단백질 함량과 적절한 탄수화물 비율을 따져서 선택한 사료는 치리오 입맛에 맞았답니다. 간식만큼은 진심인 편이라 좀 까다롭게 굴었는데도 신경 써준 것 고마워요. 


  치리오는 이제 서서히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어요. 단지 걷지 못했을 뿐 특별한 고통은 없었습니다. 점점 입맛이 없어졌어요, 이제 사료냄새가 싫어졌고요. 좋아하는 간식도 멀리하고 우유도 한두 번 핥을 뿐이죠. 먹고 싶은 게 없어졌어요. 좋아했던 북엇국도 마찬가지였고요. 요즘은 물만 조금씩 먹고 있어요. 

  사 점 오 킬로였던 치리오의 체중은 삼 킬로그램으로 빠지다가 떠나기 전, 열흘 동안은 일 킬로그램이었어요. 삼사일에 한 번씩 치리오를 안고 체중계에 올라간 엄마는 체중을 잴 때마다 울곤 했어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치리오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도 울었고요. 서서히 체온도 떨어졌어요. 그럴 때마다 엄마는 포근한 모포에 싸서 안아주곤 했죠. 사십오일이면 이별을 준비할 시간으로 충분했습니다. 

  끝까지 치리오를 간호해 준 엄마의 사랑 잊지 않을게요. 표현은 안 하지만 눈빛으로 깊은 애정을 보여준 아빠에게도 감사해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정기적으로 영상통화하면서 치리오 챙겨준 승아 누나 고마워요. 오랫동안 산책시켜 주고 영양만점인 간식을 정기적으로 주문해 준 승현 형아한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후발주자로 가족이 되어준 환이 형과 다혜 누나에게도 감사와 사랑을 전해요. 치리오의 무한 매력을 다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 아쉽지만요. 치리오가 생각날 때마다 치와 함께 했던 이야기를 나눠주세요. 그러면 가족들 기억 속에 치리오는 영원히 살아있는 거니까요. 치리오는 칠팔월 수박을 먹지 못했습니다. 유월에 무지개다리를 건넜으니까요. 대신 수박을 좋아하는 가족들이 수박 먹을 때마다 치리오를 기억해 주면 좋겠습니다. 


  떠나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던 영상이 있었어요. 엄마와 함께 봤던 <베일리 어게인> 영화 속 장면이었죠. 베일리라는 강아지가 여러 번의 환생을 통해 끝까지 주인을 지키는 따뜻한 내용의 영화였어요. 아. 어쩌면 치리오도 베일리처럼 엄마와 아빠, 승아 누나와 승현 형아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때는 가족에게 받은 사랑을 갚을 수 있길 바라요. 강아지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환생할 수도 있을 거예요. 부디 치리오랑 다시 만나게 되면 무심코 지나치지 말고 눈빛으로 오래도록 교감해 주세요.  


  십오 년 일 개월을 돌이켜보니 행복한 견생이었습니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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