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꽃과 능소화

작가님이 좋아하는 꽃이 뭔가요?

by 물들래

이연, 어젯밤 네 생각하면서 광화문 광장을 걸었어. 마음속에서 늘 살아 숨 쉬는 너의 안부를 물었지. 네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어. 네 이름은 시였으니까. 이연, 이연, 이연, 계속해서 읊조렸어. 너만 들을 수 있는 나직한 목소리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 시절 넌 부드럽고 얇은 목소리로 웃으며 대답했지. 오늘은 좀 더 오래 걷자고.


그 공간이 지금은 많이 변해서 광화문 광장을 걷고 있으면 외롭고 적적해. 변한 거리가 너의 흔적을 조금씩 지워버리는 것 같았지.


네가 그랬지? 날 만나면 힘이 된다고. 그 힘으로 가을과 겨울을 버틸 수 있었다고. 그날 넌 데이지 꽃무늬가 프린팅 된 그린 원피스에 감싸인 채 세종로를 걸었지. 네 모습은 완전 봄처녀 그 자체였어. 정말 아름다웠지. 이연, 그날 네가 품고 있던 각별한 향기를 기억해. 데이지 원피스를 입은 네게서 왜 프리지어 향기가 났을까. 봄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향기여서일까. 지금도 프리지어가 얼굴을 내미는 봄이면 한 다발씩 사서 화병에 꽂아두고 너인 양 프리지어를 바라보곤 해.


꽃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갑자기 분꽃이 생각나네. 독서모임 <야간비행>에서 일 년간 P 작가 작품 꼼꼼히 읽기 프로젝트를 끝냈지. 그 뒤, P 작가 모시고 인사동 산촌에서 식사하고 차 마시며 작품 이야기 나누었던 날 기억해? 그때 작가에게 궁금한 질문을 준비해 오라고 했던 것 생각나니? 그날 너의 궁금증은 작가가 좋아하는 꽃이었어. P 작가 바로 옆에 앉은 너는 배시시 한 미소를 보이며 작가에게 물었지.


-- 작가님이 좋아하는 꽃이 뭔가요?


P 작가는 잠깐 생각하더니 '분꽃'이라고 답했지. 그날 입고 온 앙고라 스웨터 색처럼 진분홍 분꽃을 좋아한다고 했어. 그랬더니 너는 그날부터 분꽃이 좋아질 것 같다고 했지. 그러자 멤버들 모두 박장대소하며 소박한 꽃을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할 것 같다고 했지. 유독 작가 곁에서 즐거워 보였던 너는 곧바로 작가의 최근작 속에 등장했던 능소화에 대한 이야기로 꽃에 대한 대화를 이어갔어. 그러고 보니 그날 작가의 블라우스 색깔이 능소화 빛깔이었어. 나이가 들수록 화려한 의상을 입고 싶어 한다는 걸 반증하듯 말이야. 칠순이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운 피부와 화려한 빛깔의 의상이 인상적이었어. 옷차림과 대조적으로 시골스러운 순박한 미소는 또 어찌나 정겹던지.


일 년간 열두 작품을 읽었기에 멤버마다 작가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갔고 작중 인물에게 이입하며 각자 의견을 표현해 나갔지. 나도 궁금한 걸 질문했지.


-- 이 모임에 오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 내 작품을 꼼꼼히 읽는 모임이라고 해서 겁이 났어요.


또 이런 질문도 했어.


-- 가장 인상에 남는 독자분이 궁금해요.


잠시 생각한 후 P 작가가 입을 열었다. 무척 공들여서 쓴 작품이 드라마화 됐던 때 방송국에 찾아가 원작과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항의했다는 연로한 독자의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자전적 소설을 많이 쓴 작가의 실제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어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이연은 P 작가의 곁에서 내내 즐거워 보였다. 순간 그녀의 표정에서 능소화와 분꽃, 그리고 국화와 수선화를 닮은 여러 작중 인물들이 오버랩됐다. 이연의 얼굴에 여러 여인들이 오락가락 어렸다. 소설 속 인물은 너였고 나였으며 우리 모두였으니까. 어느 인물도 낯설지 않았으니까.


P 작가의 작품 속 어떤 인물들에게선 사람냄새가 물씬 났어. 답답한 현실에서 목밑까지 치고 올라오는 갑갑함을 내뱉지 못하고 삼켜야 하는 경우를 종종 맞닥뜨릴 때가 있지. 그럴 때 속에서 꺼내고 싶은 말들을 작품 속 인물을 통해 듣게 될 때면 통쾌했어. 손 닿지 않는 부분의 가려움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시간을 잊은 채 책에 빠져들곤 했어. '야간비행'이라는 독서모임이 우리에게 선물해 주는 큰 위안이었지.


책 이야기를 통해 이연, 너는 간접적으로 너 자신을 노출하곤 했어. 그때 너의 표정과 말의 뉘앙스로 네 기분을 알아차렸지. 이연이 외롭구나, 지금 많이 슬프구나, 현재의 삶이 무척 고통스럽구나, 그럼에도 내색하지 않던 널 보면 무거운 돌덩이가 마음을 내리누르는 것처럼 답답했지.


그날 저녁 헤어지면서 네가 그랬어. 인사동에서 P 작가와 헤어질 때 작가의 발걸음이 씩씩하고 남성적이었다고. 아직도 뒷모습이 여운처럼 남아 있다고. 유미도 공감했다. 순하고 여린 표정과는 다르게 건강한 동작에서 활기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 에너지로 아직은 더 건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상처 없는 사람이 있으랴 마는, 그럼에도 피 흘리고 곪은 상처를 치유해 가는 인물, 당차고 발랄한 새로운 인물을 만날 수 있길 유미와 이연 모두 바랐다. 그 인물들이 곧 이연이고 유미이며 우리들이었으니까.


이연, 널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가끔 힘든 일 있으면 내게 털어놓으라고. 내가 그 짐 함께 나눠질 수 있다고. 인생을 너보다 더 살았으면서 미성숙한 어른처럼 비친 것은 아닐까 해서 마음이 아프다. 내가 힘들 때면 마음을 다해 따스한 눈빛으로 위로해 주던 이연, 그래서 정말 많이 미안해. 언제나 네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내 이야기에 귀 기울였던 이연. 이제 네 이야기도 좀 해달라고 하면 배시시 웃으면서 심심한 인생을 살고 있어서 할 얘기가 별로 없다던 너의 슬픈 웃음이 떠올라. 그때 이연, 너의 다문 입술은 말과는 다르게 무척 외로워 보였지. 심심함 속에 갇혀있는 가슴 아픈 일들이 느껴졌지만 어떻게 이야기의 물꼬를 틀 수 있을까 고민만 하다가 너의 아픈 마음 들어주는 것을 놓쳐버린 기분이야. 이연, 네가 사무치게 그립다. 간절히 보고 싶다.


다운로드 (2).jpg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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