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닮은 사랑
뉘엿뉘엿 해가 기울고 있었다. 뮌헨의 영국 정원 하늘은 주홍과 보랏빛으로 얼룩졌다. 유미는 중국탑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며 두리번거렸다. 이쯤 어디선가 이연이 불쑥 나타날 것 같았다. 아니 이연이 나타나주길 간절히 바랐다. 십일월 초였지만 바람은 한겨울처럼 찼다. 한 번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비행기를 탈거라던 이연, 그녀는 진짜 서울을 떠나 이십 년째 연락이 없다. 다시는 서울로 돌아오지 않겠다던 자신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듯이.
이연은 패션모델 같은 외모를 지녔다. 평범한 외모의 유미는 이연을 처음부터 야한 여자로 규정해 버렸다. 그럼에도 이연은 아주 천천히 유미 주위로 다가왔다. 외모와는 다르게 이연은 따뜻했고 사려 깊었다. 말 그대로 천생 여자였다. 가늘지만 부드러운 음색, 긴 팔과 다리, 긴 머리에 슬퍼 보이는 눈빛은 모딜리아니 작품 속에서 튀어나온듯했다.
이연의 유독 찬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고 싶었지만 유미 손도 찼다. 그래서 둘은 만날 때마다 머그컵 가득 담긴 따뜻한 차를 마시며 손과 마음을 녹였다. 차가운 손과는 달리 이연은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묘한 매력을 품고 있었다. 이연에게는 꽃보다 아름다운 인간의 향기가 났고, 부드럽고 촉촉한 기운으로 냉랭한 유미를 감싸주곤 했다.
-- 선배와 마주한 날은 온종일 따스한 그림자가 제 주변을 감싸주는 것 같아요. 어제 저녁밥 짓다가 주체할 수없이 보고 싶었죠. 그런데 오늘 선배 전화받고 얼마나 반갑던지요.
이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미는 많이 뻘쭘했고 살짝 부담스러웠다.
-- 선배 그거 알아요. 선배한테는 은은한 플로랄 향이 난다는 걸요.
유미는 자신을 꾸미지 않았다. 그냥 보이는 그대로가 유미 자신이다. 호불호가 분명하고, 가슴보다는 머리를 따르는 경향이 있으며, 말해놓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을 유독 싫어했다. 이연이 맡았다는 향이 진짜 인간 유미의 향이었을까. 그저 유미가 쓰고 있는 퍼퓸 향이지 않았을까.
-- 선배 소개로 문학 모임에서 좋은 분들을 많이 알게 된 한 해였어요. 황폐했던 마음에 차곡차곡 채워진 문장들로 성숙해져 가는 것 같아 기뻐요.
이연, 너야말로 성실하게 이 모임을 이어주고 있다고, 너를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들이 많았다고, 때때로 네가 인생 선배 같은 순간들이 있었노라고 진심을 담아 전했다.
카페를 나와서 서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건지 저건지 알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시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늑대인지 개인지 분간이 안 되는 바로 그 시간을 이연과 유미는 좋아했다. 일몰의 그 시간대는 이연과 유미의 정서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때 들었던 음악은 주로 브람스의 '왼손을 위한 바흐 샤콘'였다. 그날, 이연과 유미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브람스도 이 시간을 분명 좋아했을 거야'라는 눈빛을 교환하면서 까마득하게 웃었다.
이연과 유미는 그냥 무작정 걷는 걸 좋아했다. 광화문을 기점으로 경복궁 돌담길을 지나 삼청동을 둘러보고 다시 통의동에서 누하동으로 오르다 필운동 골목을 돌아 사직동으로 향했다. 길 위에서 나눈 대화는 강물 같았다. 때론 잔잔한 물살로 흐르다가 어느 순간 거세졌다. 다시 바다로 흘러 고요하게 잦아들었다. 거친 태풍이 몰아쳤고 파도가 덮쳐올 때도 있었다. 다시 잔잔해질 즈음 당도한 곳은 백석의 시향이 날 것 같은 와인바였다. 상호에 이끌려 들어선 공간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브람스의 음악을 부탁하고 와인을 주문했다. 흑장미 백 송이를 압착해서 뽑아낸 빛깔이 이럴까. 검붉은 와인을 따르는 이연의 눈빛이 젖어들었다.
-- 제 마음속눈물 같아요.
그 시절, 브람스를 닮은 사랑으로 힘들어하던 이연, 멀리서 바라만 봐야 하는 사랑이었다. 가까이하고 싶을수록 멀어지는 사랑, 건드리면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사랑이었다. 흑장미로 시작한 이야기는 들국화였다가 백합이었다가 일곱 송이 수선화로 끝났다. 이연이 들려준 '세븐 대퍼딜즈'는 그의 가난한 마음을 연인에게 나지막이 전달하고 싶은 유일한 곡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