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 버전으로 들어보고 싶어요
그해 가을 <야간비행>에서는 진정한 자유와 나다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책 한 권을 선정해서 읽었다. 여전히 에고와 싸우며 자유를 추구해 온 H 저자의 삶에 대한 여파가 죽산 여행까지 계획하게 만들었다.
그즈음, 어느 방송에서 도올이 그랬지. 자신은 '똥을 집어넣는 일을 하고 웃는돌에서는 똥을 빼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웃는돌 야외공연장에 오르니 도올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용설리 저수지가 안개에 가려서 까마득했다. 흐릿하게 번지던 저수지를 가뭇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시간을 떠올렸다.
사월 어느 날 웃는돌을 방문했을 때 주인은 해외 공연 중이라 만나지 못했다. 그 대신 투명한 영혼의 소유자 제니를 만났다. 일행을 토담집 하하당으로 초대해서 솔잎차를 준비해 주었지. 유미와 이연은 솔향에 감긴 듯 '하하하' 소리 내어 많이 웃었다. 그 뒤로 소나무를 보면 하하당에서 밝게 웃던 이연 너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이연, 네가 그랬어. 호호당이었으면 '호호호' 웃었을 거라고. 또 깔깔대며 제니와 함께 한참을 웃었을 거야. 웃는돌과 제니라는 이미지가 잘 부합됐지. 공간과 사람이 조화를 이룬 곳에서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유쾌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세 사람의 눈빛이 산산해졌다.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거다.
노을의 시간 앞엔 사계절 공통의 기운이 있다. 마음 한 줄기에 미세한 바람이 들이차는 느낌, 아무리 춥고 아무리 더워도 그 시간대만 느껴지는 아주 각별한 정서가 있다. 투명하고 서늘한 공기가 있다. 그 공기에 이름을 붙이자면 그리움의 공기, 혹은 기다림의 공기라 할 수 있을까. 그리움이 짙어서 기다림을 견딜 수 있는 자들만이 감지할 수 있는 공기였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야. 세 여자는 살갗에 닿는 공기로 감지했다. 하하당을 나섰다. 웃는돌 주변의 시설물을 설명해 주던 제니는 웃는돌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이 천천히 치유됐다고 했다. 자연 속에서의 산책, 자유로워지기 위해 모든 걸 쏟아냈던 몸의 움직임, 자기 내면을 감추지 않고 정직하게 대화 나누었던 게 치유제였다. 제니의 맑고 투명한 미소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묵묵히 용설리 저수지 쪽으로 걸었다. 그때 큰 개 한 마리가 제니를 따랐다. 낙조가 시작되자 영락없이 그 개는 늑대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스산한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양팔을 마주 잡고 양어깨를 쓰다듬을밖에. 샴쌍둥이처럼 이연도 같은 행동을 하다가 유미의 팔짱을 꼈다. 곁에 있던 제니의 팔에 유미도 팔을 두른 채 노을을 향해 걸었다. 세 사람은 떨어지기 싫어하는 해가 붉게 물든 하늘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때 저무는 해는 우리를 환영했을까. 그순간 우리 셋의 마음 풍경은 어땠을까.
-- 왜 해가 진다고 할까?
이연의 말에 제니가,
-- 왜 해가 뜬다고 하지?
-- 태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데 말이야.
유미는 산이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태양도 그럴진대. 진다고, 뜬다고, 구름이 가린다고, 눈부시다고, 뜨겁다고, 강렬하다고 왜 그렇게 말들을 퍼붓는걸까 싶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 태양에게 말이다. 결국 그 말은 그 사람이고, 그의 현재 마음 상태이고, 정서인 것을. 지금 우리 셋의 마음은 지는 걸까, 뜨는 걸까, 뜨거운 걸까, 눈부신 걸까. 어느 시점의 태양을 선호하는가. 새벽인가, 일출 즈음인가, 아침인가, 한낮인가, 오후인가, 일몰 즈음인가, 저녁인가, 한밤중인가. 어느 시간대나 있지만 자신들이 좋아하는 시간에 그를 만나려고 한다. 이연과 유미가 일몰 즈음 태양 만나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용설리 그곳에서의 색깔은 어떻게 기억될까. 말없이 서있던 세 사람의 뒷모습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태양은 뭐라고 답할까. 마음이 일몰이었을 그 순간의 기억을 세 사람은 각자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이연, 네가 그랬지. 웃는돌에 머물고 싶다고. 난 아예 눌러살고 싶다고 했던가. 제니가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했지만 당장은 용설리의 어둠을 뚫고 서울로 가는 게 우리의 할 일임을 알고 있었지.
제니의 메일을 받았다. 맑고 투명한 제니의 미소가 메일에서도 느껴졌다. 제니의 풋풋한 살결과 꾸밈없는 미소에는 친숙한 자연의 향기가 났다. 제니의 향기가 사뭇 그리워질 즈음, 회색빛 도시에서 찌든 영혼은 힘겨운 기지개를 켰다.
-- 죽산 쪽에서 자꾸 신호를 보내와요.
-- 맞아. 용설리 석양이 어제도 꿈에 나오더라. 십일월을 지나치면 후회할 거라면서.
어떤 신호처럼. 갑갑한 도시에서 탈출시켜 달라는 메시지를 감지했다. 스산한 늦가을 용설리 저수지 풍광을 다시 만나기로 했다. 용설리 저수지에서 불어오는 십일월의 찬바람으로 오염된 마음을 씻어내고 오리라. 푸른빛 감도는 죽산 그곳의 공기를 폐부 가득 채워오리라. 긴 겨울을 잘 나기 위해서라도.
십일월 하순, 세상이 희뿌연 안개로 덮였던 날, 제니를 만나기 위해 이연과 유미는 죽산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무애하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대던 이연. 천생 여자 이연은 운전할 때만큼은 거침이 없었다. 한마디로 나이스 한 드라이버였다. 배경음악은 브람스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 십일월에는 브람스죠.
-- 맞아. 가을엔 브람스를 들어야 해.
준비한 음반을 플레이하던 이연, 첫 곡은 브람스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연습곡'이었다.
브람스는 오른손에 부상을 입은 클라라 슈만을 위해 이 샤콘을 편곡해 주었다. 아마추어 감상자임에도 이 곡을 들을 때면 원곡자인 바흐와 편곡자인 브람스 모두 우러러볼 수밖에 없다. 연주를 영상으로 감상했던 적이 있었다. 왼손으로만 연주하다가 왼손까지 부상당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열정적이고 힘 있는 연주곡이었다.
-- 클라라 버전으로 들어보고 싶어요.
-- 미투.
그러나 슈만 클라라의 연주는 찾기 어려웠다. 레온 플라이셔의 연주로 감상했다. 스승의 아내를 위해 평생 외사랑으로 지켜준 브람스야말로 지고지순한 사랑꾼이 아닐까. 왼손을 위한 피아노 연습곡은 클라라를 향한 사랑의 확증이고 헌정이었다.
달리는 도로가 만추 일색이었다.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던 작은 사찰에 들러 늦가을 고운 단풍의 절정을 만났다. 웃는돌에 도착했을 때 네 마리의 개들만이 우리를 환영했다. 문은 다 열어놓았으나 웃는돌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제니가 보낸 메일 내용이 떠올랐다.
<겨울에 오시면 따뜻한 장작 피워놓고 웃는돌 느끼세요. 웃는돌 제니>
제니에게 간다는 걸 알릴까 하다가 부담 없이 만나고 싶어서 출발한 여행이었다. 제니와 주인장 모두 만나길 바랐으나,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하하당에 장작을 피워놓고 이연과 음악을 들었다. 좀 전까지 누군가 장작을 땠는지 불씨가 남아 있었다.
마른 낙엽과 장작을 피우면서 수선화를 닮은 이연의 힘겨운 사랑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희생만 강요당하는 이연의 사랑에 화가 났다. 유능한 사회인인 그녀가 사랑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에게 너무 헌신하는 건 아닐까 싶어 안타깝기까지 했다. 사랑이라는 허울아래 이연을 서서히 갉아먹고 있는 상대가 뚜렷하게 보이는데 정작 이연은 그걸 사랑이라고 믿었다. 아니 어느 순간 착각인 줄 깨달았으면서도 그동안의 사랑을 부정하고 싶지 않은 몸부림 같았다. 퍼주고 퍼주다가 이제 바닥이 드러나서 이연 자신도 메말라가고 있었다. 왼쪽 입꼬리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처럼 느껴졌다.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이연의 찻잔에 따뜻한 물을 조금씩 채워주었다. 어깨를 떨며 차가워진 손으로 찻잔을 감싼 채 찻잔 위로 퍼지는 하얀 김을 바라보았다. 가라앉지 못한 쓸쓸한 분위기가 공기 중에 부유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근처 마실 나갔다는 웃는돌 주인장을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한 채, 개와 늑대의 시간이 다가올 즈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주차장에서 만난 옆집 아주머니께서 제니가 일본 여행 중이라고 했다. 황량하고 쓸쓸한 십일월 풍경을 가슴에 쓸어 담고 돌아온 며칠 후 제니의 메일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먼저 아쉽고 보고 싶네요. 늘 메일을 열 때마다 생각나는 이름입니다. 일본에 다녀와서 오랜만에 용설리 저수지를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조각하는 이웃분께서 유미님과 이연님이 며칠 전 다녀갔다고 하더군요. 요즈음 옴하고 매일 즐겁게 나무하며 신선놀음하고 있지요. 신선놀음 열심히 해 놓을 테니 훌쩍 다시 한번 들려주셔요. - 제니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