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사 덴버의 기록
나는 사과도 못 깎는다. 그런 내가 신혼 초 꼴에 남편에게 뭐라도 해줘 보겠다고 소시지 야채 볶음에 도전했다. 딴에는 맛있게 되었다고 기세 등등해서 내밀었고, 덴버도 맛있다며 먹길래 진짜 그런 줄 알았지. 얼마 뒤 덴버가 이번에는 자기가 해주겠다며 뚝딱뚝딱 소시지 야채 볶음을 만들어 내왔다. 호프집에서만 보던 네 발 곱게 벌어진 문어 모양 소시지에 정갈한 사각형 야채들을 보는 순간 나는 결심했다. 다시는 이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으리라.
솔직히 나는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도 않으니 아마 평생 늘 일도 없을 거다. 그런데 꼴에 입은 까다롭다. 엄마는 건강을 위해서라며 그 2000년대 초반 튀김기(!)로 양파링을 만들어주던 사람이었으며, 손맛 좋은 외할머니는 내 어린 시절의 백종원 선생님이었다. 심지어 첫 직장에서 외식 브랜드 마케팅을 담당하게 되면서 부산 촌년의 입맛과 눈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만 갔다. 출장이라는 미명 하에 일본의 구루메(맛집) 콘테스트를 관람하러 다녔으니 오죽했을까. 그러니까 어쩌면 내가 요리사와 결혼한 건 아주 자연스러운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내 손을 움직이지 않고도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는 최상의 조건. 월급 수준에 맞지 않는 맛집을 돌아다녀도 욕하지 않는 남편. 그런 면에서 덴버는 내게 완벽한 남편이다.
사실 처음부터 덴버가 요리사였던 건 아니었다. 결혼을 결심할 당시만 해도 그는 호텔외식경영을 전공했으나 ‘경영’만 살려서 조그만 회사의 인사 총무일을 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런 그에게서 요리사의 스멜을 느낀 건 교회 수련회에서였다. (우리는 교회에서 만났다.) 모두가 고단한 아침, 그는 50여 명 남짓한 청년부의 식사를 혼자서 준비했다. 메뉴는 닭볶음탕이었나 아무튼 빨갛고 매운 한국식 밥이었고, 당시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채식 식단을 고수하던 중이었다. 모두가 군침을 흘리는 가운데 홀로 멀뚱 거리던 내게, 몇 번 말도 섞어보지 않았던 이 교회 오빠가 불쑥 한 그릇의 샐러드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야채는 너무 씻지도, 그렇다고 대충 씻지도 않아 아삭하고 신선했으며 드레싱도 과하지 않았다. 아마 나는 그때 이 남자의 요리 본능을 캐치했던 것이리라.
결혼 후 그는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서른 셋 나이에 요리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아무리 대학에서 요리 공부를 했다고 하더라도 야전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나이 많은 초짜였고, 실수 투성이었으며, 가끔은 의욕만 앞서기도 했다. 시댁 시구들의 반대는 우리 부모님의 그것보다 거셌다. 특히 본인이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평생 주방에서 일해야 했던 우리 어머님은 제발 부탁이니 그만두고 다시 이전 회사로 돌아가라고, 덴버를 볼 때마다 통사정을 하셨다. 친척 어르신들은 내게 “너는 남편이 ‘그런’ 직업인데도 괜찮니?”라고, 바로 옆에 오빠를 두고 물어왔다. 그 말을 못 들은 척 묵묵히 밥만 집어먹던 그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직업이란 대체 어떤 직업일까? 인서울 대학을 나와서, 대기업이나 적어도 중견 기업에 취업하는 것 외의 다른 모든 옵션은 ‘그런’ 것일까? 평생 착하지만 공부는 못하는 아이로, 그래서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변변한 주목 한번 받지 못한 99%의 사람들을 모두 ‘그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서울 변두리 대학의 호텔경영학과를 나왔다는 것 자체만으로 집안에서 걱정거리 취급을 받아야 했던, ‘그런’ 사람이 꽁꽁 숨겨둔 잠재력과 재능이 얼마나 큰지 왜 그 누구도 재어보지 않았던 걸까.
내 남편 덴버. 36세를 목전에 두고, 날고 기는 요리사들이 모인다는 호텔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부모님 속 한번 썩여본 적 없는 이 남자가 서른 넘어 (우리 어머님 말 빌리자면) 엄마 가슴에 대못 박아가며, (또 우리 어머님 말 빌리자면) 마누라 고생시켜가며 선택한 길이다. 남들 쉬는 날 못 쉬고, 남들 안 쉬는 날도 못 쉬는 직업이다. 샛별 보며 집 나서서 밝은 달 빛 아래 퇴근하는 매일이다. 그래도 그는 출근을 하고, 칼을 쥐고, 팬을 돌린다. 주 5일 정시 퇴근하던 그때보다 불 앞에서 베이고 데어가며 씨름하는 지금이 좋다고 한다.
내가 덴버의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가 지나온 길은 대한민국이 말하는 ‘정상’ 궤도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의 그것이기 때문이고, 둘째,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또 다른 이에게는 위로가, 멀리 내다보면 미래가 될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제발 본인 이야기 좀 글로 쓰라고 했는데 바쁜 데다 글솜씨도 없다고 징징대길래 그냥 내가 쓰기로 했다. 물론, 요리사의 아내로 뒤룩뒤룩 살쪄가는 내 넋두리도 좀 하고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