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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미미 Nov 22. 2019

2. 그는 어쩌다가 천직을 찾는데 33년이 걸렸나

요리(사)를 찾아서



이건 아주 평범한 이야기다. 80년대 초중반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일을 덴버도 겪었다. 바깥일을 하는 아버지와 집안 살림을 돌보는 어머니는 가정의 정석. 나쁜 친구 사귀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효도의 정석. 그러지 못하면 세상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던, 세기말과 함께 자란 청춘.


1985년 12월 31일, 그것도 밤늦게 태어나는 바람에 난지 몇 시간 후 두 살이 되어버린 덴버는 생일만큼이나 모든 게 느렸다고 한다. 어머님은 애가 하도 말도 느리고 반응도 느리고 아무튼 죄다 느리길래 어디 아픈가 싶어 병원에 데려가시기도 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이어지는 엄마의 잔소리에 ‘엄마 마음만 있어? 내 마음도 있어!’라며 와앙 울어버리는, 꽁꽁 숨겨둔 고집이 여간이 아닌 막내아들이었다. 


그래도 재능은 많아서, 그림도 곧잘 그리고 뚝딱뚝딱 만들기도 잘했다. 특히 그림으로는 꽤 큰 대회에서 상을 받아올 정도로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식당 일을 하는 엄마의 영향인지 요리도 좋아했다. 그림이든 요리든 혼자서 조용히,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게 좋았다. 또 내가 만든 요리를 누군가 맛있게 먹어 주는 게 그렇게 기뻤다. 대한민국에서 공부에 소질이 없는 아이로 자란다는 건 그만큼 누군가에게 칭찬받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러나 누구나 맛있는 음식에 대해서는 후한 감사를 표한다. 만든 이에게 그만큼 뿌듯한 일은 없다.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나갈 즈음 담임 선생님이 그를 앉혀놓고 조곤조곤 말했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대학에 가기는 힘드니 직업반을 가자. 너의 손재주를 살려서 기술을 배우면, 분명 대학에 가는 것보다 훨씬 잘 풀릴 것이다. 본인도 공부는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은 했으나 (그래서 내심 직업반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좋은 대학을 가는 것만이 한 평생 고생한 엄마에게 효도하는 거라고 배웠다. 아니, 무엇보다 ‘공부를 못해서 직업반에 가는 것’은 낙오 인생의 시작이라고 평생을 들어왔기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지지리도 소질 없는 공부의 길을 선택했고, 수능을 망하고, 재수를 하고, 군대를 갔다 와서, 삼수를 했다. 


잠도 밥도 청춘도 줄여가며 받은 삼수 성적표는 보잘것없었다. 고민 끝에 그가 고른 학과는 아이러니하게도 호텔외식경영학과였다. 왜 그런 선택을 했냐고 물으니 이왕 먹고살 걸 배우려면 좋아하는 걸 배우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결국은 요리가 좋았던 것이다. 그렇게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좋아하는 것을 시작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학과 생활은 적성에도 맞았고, 그러니 당연히 재밌었다. 대인 기피증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성적인 사람이 학과 대표를 할 정도였으니. 결국 차석으로 졸업, 누구나 알아주는 호텔에 인턴 자격으로 입사했다. 이제 모든 것이 잘 풀릴 줄 알았던 그때 집에 큰 우환이 닥쳤다. (이 얘기는 나중에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보기로 하자.) 아무튼 그렇게 또 폭풍 같은 1년 여가 지난 뒤, 그는 다시 호텔로, 요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홀로 남은 어머니가 아들이 주방으로 들어가는 걸 원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덥지도 춥지도 않은 사무실에서 일하길 간절히 바라셨다. 착한 막내아들은 그 길을 선택했다. 50번도 넘는 서류 탈락을 거치고 나서야 작은 게임 스타트업에 총무로 채용되었다. 그의 나이 서른 하나였다. 


지금도 덴버의 책장 한 쪽에는 요리 관련 책들이, 한 구석에는 총무 관련 서적이 놓여있다.


총무로 일하는 이년 간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회사도 꽤 커져 갔지만 퇴근길은 늘 허무했다. 전문 기술직 동료들 속에서 자신의 입지는 언제나 초라했으므로. 무엇보다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개발자, 디자이너, 기획자들 틈바구니에서 나도 무언가 만들어 내고 싶다는 장인 본능이 꿈틀거렸다. 그 본능을 발산하지 못하고 억눌러야만 하는 매일은 조용한 고통이었다. 그즈음 나(지금 글 쓰는 이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이 맛있는 것만 좋아하는 세상 까다로운 여자가 그의 요리 본능에 불을 지핀 것이다. 회사 사장님의 만류와, 부모님 및 일가친척들의 눈물을 뒤로하고 회사에 사표를 냈다. 엄마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도 있다던 막내의 고집에 늦바람이 들어 불이 붙었다. 그렇게 그는 늦깎이 신입 요리사가 되었다. 그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시간에 만약을 붙이는 것만큼 무의미한 건 없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만약 그가 담임선생님의 조언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조금이라도 반골 기질이 있어서, 너의 소질과 재능이 아니라 사회가 주는 잣대에 맞춰 살라는 목소리들에 반항이라도 한번 해봤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몇 만 그릇의 요리를 더 만들지 않았을까. 그만큼 몇 만 번의 식사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을까. 불 앞에서 칼 들고 땀 흘릴지언정 매일 두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뿌듯함을 더 빨리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이란 건 없지만.


나는 요리를 하고 있는 덴버가 좋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감 있는 칼질, 불 앞에서의 당당한 태도를 보는 게 즐겁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과 함께 지낸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에너지를 준다. 보는 이도 그러한데 본인은 어떻겠는가. 그래서 가끔 속상하다. 왜 더 빨리 이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을까. 어찌하여 그는 천직을 직업으로 선택하는데 33년이라는 시간이 걸려 버렸나. 누구의 잘못인가. 공부 1등만 1등이고, 노래 1등, 달리기 1등, 게임 1등은 꼴찌나 진배없는 입시제도? 네임밸류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 사랑하는 자식이 그런 사회에서 살아남기 바란 나머지 안전한 길만 걸으라고 종용하는 부모의 마음?


누구를 탓하랴. 나이 40 줄 들기 전에 천직을 찾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자. 그렇게 서른다섯 덴버는 오늘도 불판 앞에 서고, 나는 컴퓨터 앞에 앉는다. 우리보다 어린 누군가가 좀 더 빨리 자신의 본능에 귀 기울일 수 있기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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