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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까치 Apr 08. 2024

어른만 사는 세상 [33/365]

2024년 4월 6일에서 8일, 21:05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를 온건 2019년 겨울의 일이었다. 만 4년 남짓 이 동네에 살고 있는데, 처음 2년은 동네에 나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내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옆집 부부를 제외하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여서, ‘안다’고 할 수 있는 이웃이 없었고, 그 사실 자체도 대수롭지 않았다.


2022년부터는 동네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 둘 생겼고, 지금은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를 넘어, 옆 단지에도, 근처 마트며 약국, 제법 거리가 있는 식당에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꽤 있다. 2022년은 아들이 태어난 해인데, 아이가 걷고 달리는 거리가 늘어나는 것에 비례해,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점차 늘어났다.




세 살짜리 아들과 걸으면, 온 세상이 우리에게 친절해진다. 반대편에서 마주 오는 열 사람 중, 아홉이 우리에게 시선을 주고, 그중 여덟이 우리를 향해 활짝 웃는다. 또 그중 절반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고, 몇몇은 가던 길을 돌아와 칭찬과 축복을 하는가 하면, 주머니에 있던 주전부리를 내어 주는 사람도 있다.


동네 식료품점 사장님은 매번 아들을 문 밖까지 마중한다. 지난 여름 강원도에서 만난 중년은 ‘아저씨랑 가자‘며 아들 손을 잡고 산길을 걸었다. 집 앞을 지나는 2번 버스 기사님과, 청소차 뒤에 매달린 40대 미화원, 7층 사는 새침한 여중생 모두가 살갑다. 나는 요즘 전례 없이 많은 사람들의, 전례 없이 환한 얼굴을 보며 지내고 있다.




아들 없이 홀로 걷노라면, 이 모든 친절이 이미 모두 사라지고 없음을 느낀다. 그야말로 스위치를 ‘탁’ 내린 것처럼, 모두들 언제 그랬냐는듯 무표정한 얼굴로 지나쳐 멀어진다. 처음 이런 일을 겪은 날은, 이토록 빠른 태세 전환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는데, 지금은 이것이 다 자란 낯선 성인 사이의 일반적인 모습임을 상기한다.


어린아이는 독특한 존재다. 자신을 내보이는 것만으로도, 돌처럼 굳어있는 얼굴들을 일순 활짝 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힘의 원천은 존재 자체의 순수성에 있는데, 딱히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아도, 그 고운 얼굴과 작은 손, 엉성한 걸음 같은 것들이, 오래전 그 시기를 지나온 다 자란 사람들의 마음을 덥힌다. 논리적인 설명은 어렵다.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마음은 본능이고, 본질적인 것이다.




아이들이 없는 동네, 어른끼리만 살아가는 사회는 무심하고 건조하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우리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느낀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합계 출산율 0.72의 끝이, 국가 단위의 생산성 저하나, 세대 단위의 부양 부담 증가가 아니라, 순수함이 결여된 사회, 그래서 경직되고 무심하기만 한 사회로 이어질 것만 같다. 관념적이지만 그렇게 느낀다.


이곳에서 살아갈 날이 구만리인 아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계기와 기적 같은 전환이 찾아오면 좋겠다. 아들이 다 자란 언젠가, 내게도 길에서 예쁘다 좋다 말 건넬 기회가 많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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