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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나 Apr 24. 2024

라떼는 말이야...

일본 워홀러 시절에 했던 언어교환 이야기

 호랑이 담배피던 옛날에 일본 워홀을 갔을 때

일본어는 배워야겠는데 어학당을 등록할 돈이 없어서 언어교환을 했었다.

메시지를 주고 받다가 서로 잘 맞으면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오프라인으로도 만났는데

일본 가서 셀프 소개팅을 하는 거냐는 농담을 들을 만큼 언어교환 사이트를 통해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감사히도 위험한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는 좋은 기회가 많았다.

귀국을 한 다음에도 연락이 이어져 한일 양국을 오가며 만났던 친구들도 있고

심지어 지금까지 연락하는 일본인 친구도 있다.


이래서 라떼는 말이야가 나오나싶긴 하다.

..나때는...ㅋ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니 요즘처럼 앱으로 쉽게 메시지를 주고 받는 것도 아니었고  

컴퓨터를 켜서 언어교환 홈페이지에 들어가야만 쪽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급한 일이 생기거나 늦어지면 사전에 연락을 하면 했지 연락 없이 바람을 맞거나 맞힌 적도 없었다.   

만나기로 하면, 우리는 정말 만나는 거였다.  

지금 생각하면 답답해서 어떻게 살았나 싶지만

그 때문에 아날로그식 인간관계는 지금보다 더 느리고 깊었던 것 같다.


이상한 일은 한번 있었다.

만나고 나서 정말 싫다고 친구들에게 욕하며 다시 안 만났던 아저씨가 한 명 있다.

내 입장만을 들은 내 친구들은 당연히 모두 내 편이었는데

비슷한 생각을 하는 또래가 만나니 자기들만의 생각으로 똘똘 뭉쳐서 다른 의견은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요즘 커뮤니티나 알고리즘의 부작용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 아저씨는 만나서 반갑다며, 혹시나 내가 캬바쿠라죠일까봐 걱정했는데 아니라서 너무 다행이라고 말했다. 순간 기분이 확 나빠졌다. 나를 캬바쿠라죠로 생각했다고?

 * 캬바쿠라는 일본 특유의 술집 형태인데, 술을 마시며 여성 종업원과 대화를 나누며 친밀한 서비스를 즐기는 술집이다. 캬바쿠라죠는 캬바쿠라에서 일하는 여자를 가리킨다.


그 아저씨는 카라의 팬이었다. 그래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쵸비진 이라고 했다.

  * 비진은 미인, -는 우리말로 완전~이런 느낌, 그러니까 쵸비진은 완전 미인이라는 뜻이다.

칭찬이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캬바쿠라죠 운운하던 사람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20대였던 내 눈에는 딸과 비슷한 나이대의 외국 여자 가수를 좋아하는 일본 중년 남성이 변태같아 보였다.  

이런 변태같은 사람이라서 언어교환 상대에게 캬바쿠라죠나 쵸비진 이라는 말을 꺼내지 싶었다.


아저씨는 국어 방문교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일본어를 잘 가르쳐 줄 수 있다고 했다.

스케줄은 언제 언제가 비는데 다음 만남은 언제가 좋겠냐고 했다.

그때는 공교롭게도 12월이었고, 아저씨가 비는 시간 중에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도 있었다.

이 변태가 크리스마스에 스케줄이 빈단다. 누가 만나줄 줄 알고?


아저씨와의 만남 후에 친구들에게 아저씨에 대한 험담을 늘어놨고

한동안 친구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쵸비진이었다.     

언어교환 하겠다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더니 결국 변태 아저씨를 만났다는 놀림도 받았다.  


언어교환 사이트에서 나이를 볼 수가 있었다.

그 아저씨는 나보다 나이가 두배 가까이 많았는데

일본어를 배우고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싶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도 20대 여성과 4-50대 남성의 만남은 뭔가 수상쩍어 보이긴 한다. 본인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이성의 외국인이 흔쾌히 약속 장소로 나오겠다고 하니 그쪽에서는 쟤가 혹시 사기꾼은 아니겠지 싶었을 거다. 그러니까 직업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닐까 했던 건데 그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솔직히 말해준 것은 단지 해프닝이었을 뿐 전혀 기분 나쁠 일이 아니었다.


덕질이 뭐가 어떻다고, 카라의 아저씨팬을 변태 취급하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부끄럽고 편협한 생각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일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건전한 취미 중 하나인건데 거기에 나이는 전혀 상관이 없다. 처음부터 삐뚤어져서 아저씨가 곱게 보이지 않으니 시비 걸 생각만 했던 것 같다.

그 당시에 카라가 일본에서 인기를 끌며 덩달아 현지에서 한국 여자들의 위상도 높았었는데

그냥 내가 한국인 여자라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마음에, 그리고 어색한 첫 만남에 예의상 예쁘다고 한 말은 무례하거나 '변태같은' 의미가 전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휴식기라 회사에 다니지 않으니 일정한 스케줄은 없다.

하지만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비정기적인 일정들이 간헐적으로 잡혀 있다.

이번주는 평일 중에서도 언제언제가 가능하지만 다음주는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도 일정이 있는 경우도 있으니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언제 되는지 간단히 물을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일정을 미리미리 정확하게 잡아두는 게 편하고, 어떨때는 내 일정을 알려주며 혹시 맞는 시간이 있는지 묻기도 한다.  

..그때의 나는 한가한 워홀러인데다가 알바도 하기 전이고 지금보다 더 망나니 같이 자유로웠던 성격탓에

미리 약속을 정해두고 그걸 지키는 것보다 즉흥적인 약속이 더 짜릿하고 재밌었지만,  

프리랜서 아저씨는 미리미리 약속을 정하지 않으면 갑자기 시간을 빼기 힘든 위치였던 것이다.


 그때의 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좁고 얉게 생각하며 고집 피우던 그때의 나를 반성한다.

하지만 이해도 안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던 부분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라떼는 말이야를 외치며 요즘 것들은 왜 저러냐고 말하기 보다는

그때는 나도 그랬었지, 라고 젊은 세대를 조금 너그럽게 봐 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리는 모두 그때가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 우리 때가 되어본 적이 없어 모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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