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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책! 롬멜과 아프리카 군단

#69 독일은 제2차 대전에서 왜 패배했나?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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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밝힌 히틀러의 대 실책에 대해 한 번 정리해 보자. 물론 군사적 실책 위주로 꼽은 것이다. 점령지 정책이나 인종 학살. 거기에 공업 생산력과 생산 정책 등을 제외한, 순전히 전쟁 수행과정의 실수.



7가지 군사적 대 실책



첫 번째, 롬멜을 북 아프리카에 보낸 것.

두 번째, 크레타 침공.

세 번째, 러시아 침공.

네 번째,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

다섯 번째. 스탈린그라드 시가전.

여섯 번째 동맹국들의 2류 전투력.

마지막 일곱 번째가. ‘발지’에서의 건곤일척 대공세.


그렇다면 여기에서 맨 첫 번째 ‘롬멜과 아프리카 군단’에 대해 한 번 분석해 보자. 도대체 그게 왜 대 실책이 됐는가를.



아프리카에 대해 몰랐던 히틀러



사실 히틀러는 아프리카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 했다. 분명 천재성을 지닌 비상한 인간이나, 그가 자라 온 환경은 같은 나이의 평범한 유럽 사람보다 좁으면 좁았지, 넓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은 환경의 포로다. 삶의 조건에 따라 가치관이 형성된다. 따라서 유럽 내륙에 갇혀 살아온 히틀러에게 독일 북쪽 바다 북해를 본 적은 있을 지라도 너른 바다를 접한다거나 생각해 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파시스트 국가 이태리는 아니다. 3면이 바다인 반도로서 지중해와 함께 커온 나라다. 그들의 영광, 로마는 지중해를 아우르는 대 제국이 아니었던가?


카르타고와 치렀던 처절한 3번의 포에니 전쟁, 그것도 '지중해의 패권을 누가 차지하는가?' 그런 싸움이었다.


*Bad case of friendship 출처: smithsonianmag.com



따라서 그를 충동질한 건 추축국 동맹이자 파시스트 친구 무소리니였다. 그의 운명과 새로운 로마 제국은 지중해에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확실히 친구는 잘 만나야 된다).



무소리니의 간청



이 파시스트의 원조는 2천년 전의 로마 제국을 다시 세우겠다며, 일찍부터 북 아프리카 여러 곳으로 쳐 들어가는데, 그리스로 가선, 어기적거리다가 결국 패한다.


그러고도 북 아프리카에서 군대를 기동. 영국한테 덤벼들었는데 여기서도 된통 당하는 건 마찬가지. 따라서 발칸 반도 내 그리스에서도 북 아프리카에서도 되는 게 없었던 무소리니는 히틀러에게 간청한다.


도와 달라고.


그때 히틀러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스로부터 영국 폭격기들이 출격, 히틀러가 가장 아끼는 루마니아 유전지대를 폭격한 것이다.


*초기부터 활약한 영국의 빅커스 웰링턴, 쌍발이지만 꽤 힘이 쎄, 유전지대에 큰 타격을 줄만 하다. 출처: wikimedia.org



그에게 있어서 전쟁 수행의 두 가지 축은 철광석과 석유!


그래서 노르웨이를 점령하지 않았던가? 이 철광석 때문에... 스웨덴의 철광석을 노르웨이 항구로 옮겨, 가져와야 하니까. 나머지는 하나는 당연히 석유.


"앞으로도 자꾸 폭격기를 띄우면 어떻게 되나?" 더구나 영국은 항속력 좋은 4발 중폭격기들을 속속 개발, 취역시키는 중이다. 폭탄도 많이 싣는 것들을.


히틀러는 그래서 1941년 1월, 북 아프리카에 대한 지원을 명령하고, 2월, '독일 아프리카 군단(DAK)' 사령관에 롬멜을 앉힌다. 그리고 다음 달 롬멜은 수송기를 타고 트리폴리로 날아간다.


그를 맞이하는 건 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 2년 반에 걸친 북 아프리카 전투의 시작이며 동시에 전설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20세기의 한니발



처음엔 연정 연승, 눈부신 활약을 한다. 사막의 여우, 롬멜 전성기의 시작이다. 가는 곳마다 영국군을 격파하는 롬멜. 정말 신나는 진격이었다. 그때의 롬멜은 독일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핫한 영웅이었다.


그가 카이로로 점점 가까워질수록 명성은 더욱 높아져 갔다. 그러나 반비례로 보급은 어려워진다. 지들 때문에 아프리카로 갔는데 이태리는 영국 함대에게 여러 차례 패전, 지중해의 제해권, 제공권을 확보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심각한 건 당시 영국군이 장악한 지중해의 심장 몰타 섬.


*시칠리아 바로 코앞인데도, 이태리와 독일은 섬을 함락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롬멜의 패인이 된다. 출처: elojodigital.com



추축국 폭격기들의 사정없는 폭격. 섬에 대한 점령도 동시에 계획되었으나, 수차례 연기되고, 또 동부전선의 전황으로 인해 폭격기 부대가 차출되는 등, 결국 몰타 공략에 실패, 영국군한테 그 심장이 회복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몰타는 섬이 아니다. 요새다. 옛 오스만터키도 건드리지 못한 요새. 2차 대전 땐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지중해의 불침 항모. 출처: ey.com



그 후 영국은 몰타를 근거지로 해, 롬멜한테 가는 보급로 끊임없이 타격 한다. 그리고 드디어 진짜 악몽이 시작된다.


난 데 없이 일본 함대가 진주만을 때린 일. 아직은 전쟁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던 미국을. 그리고 총통은 또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미국한테 무슨 계산인지 선전 포고를 해버린다.


미군의 본격적 북 아프리카 상륙이 시작된다. 그것도 또 3개의 기갑 사단과 4~5개의 보병 사단, 10만 병력이 반대쪽 먼 곳 모로크 알제리에서의 상륙.


앞에는 영국군이 있는데, 저기 저 뒤쪽에서 미군 10만 명이 상륙했단다. 전투 경험은 전혀 없지만 지들이 제일 잘 났다고 생각하는 데다 보급이 풍부한 미군. 비록 탱크 병들의 실력은 애송이 비슷하다. 허나, 탱크들은 브랜드 뉴 키트, 신형에다가 전투력이 좋다.


결국은 속절없는 후퇴. 리비아와 알제리 사이의 튀니지 반도 비슷하게 생긴 데까지 가, 거기에다 방어선을 친다.


*지도를 보며 작전 구상하는 롬멜. 출처: historylearning.co.uk



2년 반 후에 궤멸되는 아프리카 군단



히틀러도 급했는지 이태리 나폴리 등의 비행장에서 수송기로 정예 낙하산 부대, 강하 사냥꾼 등을 파견, 서포트를 해 준다. 그래서 이 마지막 전투 지역인 튀니지에서, 독일과 이태리 군은 무려 35만 명을 포진. 방어를 한다.


그러나 공격 쪽은 더 많았다. 오랜동안 사막에서 싸워 온 기존 영국군에다 새로 상륙한 미군, 또 뉴질랜드 같은 영연방과 언제나 용감했던 폴란드군. 그리고 새롭게 힘을 보탠 대 병력들이 있으니, 그것은 프랑스와 리비아나 알제리 등의 프랑스 해외 식민지 군.


해외 식민지 군만 해도 10만 명이 넘는 대병력이다. 당연히 추축군은 패배한다. 보급은 안 되고 보유한 무기들은 가동률이 형편없고, 병사들 또한 피곤에 찌든 상태라, 패배할 수밖에.


더구나 이곳에서의 패배는 가장 나쁜 경우였다. 통상적 전쟁처럼 후퇴를 한 뒤 한숨 쉬고 재정비, 다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뒤쪽은 미 해군과 영국 해군이 잡고 있는 바다, 앞과 옆은 연합군에다가 그나마 연합군 없는 지역은 끝없는 사막.


그렇다고 해서 지중해를 건널 수송선도 없고, 하늘 길로 후퇴를 도와줄 수송기도 와 줄 수 없었다. 제공권, 제해권, 모두가 다 연합군이 거머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2천년 전의 로마 군에 에워싸여 최후의 항전을 하던 불쌍한 카르타고.


*불타는 독일 4호 탱크와 그 옆을 지나가는 영국, 크루세이더 탱크. 출처: wikimedia.org



어느 군사 잡지에 보면 독일군은 이때 13만 명의 포로, 이태리 군은 18만 명이라 하고, 위키피디아에선 추축군 둘 다 합쳐 25만 명이라고 나와 있다.


*아프리카 튀니지, 독일과 이태리 군 포로들. 출처: blogspot.com



히틀러의 뼈아픈 손실은 더 있다. 바로 무기류다.


역시 위키 기록만 찾아봐도, 추축군은 이 전투에서 450대의 탱크를 잃고, 1000대의 야포와 같은 수량 이상의 수송 트럭도 잃는다. 또 놀라운 것은 무려 3000대의 비행기를 여러 상황으로 잃어버렸다는 기록이다.


전투 중 격추가 됐건, 연료가 모자라 활주로에 그대로 세워 놨건, 뺏기기 싫어 휘발유를 끼얹어 불을 질렀건, 모두 3000대!


분명 이건 엄청난 숫자인데, 필자는 이 숫자를 이렇게 본다. 영국과 싸우기 훨씬 전 리비아의 주둔 비행대에다, 에티오피아 침공 때 동원된 비행기들을 포함하고, 그러다 고장 나, 활주로 구석에 세워 놨던 구식 복엽기까지의 합산일 거라고. 어찌 됐든간에 3000대는 어마어마한 숫자!


*이래 보여도 현역 때의 이름은 스팔비에로(제비 솔개)였다. 이태리의 3발 폭격기 SM-79. 출처: thechive.com



독일의 포로는 모두 베테랑들이다



더구나 독일 쪽을 살펴보면, 병사나 지휘관들을 막론하고 전투의 프로들이었다. 부족한 장비와 보급 속에 악전고투를 하며 엘 알라메인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그 길을 따라 후퇴해 온 사막전의 베테랑들.


그들 13만 명은 독일로 돌아가지 못하고, 땡볕 속에 포로수용소로 향하는 발걸음을 걷는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병사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거 같다.


동부 전선에서처럼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등 뒤 모래 속에 누워있는 전우들과 달리, 지금 두 발로 걸어가는 중이니까.


"그래, 이제 우리의 전투는 끝났어..."


전력이 비슷할 땐 거침없이 전진했고, 전력이 부족해도 끈질기게 버티던 아프리카 군단. 그들의 노고는 끝난 것이다.


그런데 히틀러는 뭔가?

완전 빈 손, 그 자체였다. 단 1평의 영토도 얻지 못했고.



손해만 무지 본 히틀러


*3호 탱크, 로스트 인 사하라 출처: 2live.com



한 군사 서적에 튀니지 전의 독일 군 오더가 나온다. 그것을 잠깐 옮겨 적으면.


HG(헤르만 궤링) 강하 사냥꾼(엽병) 사단.

제 10 기갑사단.

제 15 기갑사단.

제 21 기갑사단.

만토이펠 사단.

제 334 보병사단

제 990 사단.

제 90 경(輕) 사단.

제 164 경(輕) 사단 등. 


사하라 사막의 전설을 만든 숱한 사단들이, 이렇듯 모래 바람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또 하나, 히틀러로서는, 말은 못 하면서 몹시 속상한 일이 있다. 루마니아 유전지대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포석 중 하나가 아프리카 군단 아닌가? 그런데 그는 경솔하게도 숱한 낙하산 부대를 점령지 그리스로부터 출발시켜, 크레타 섬에 대한 강습을 실시, 많은 피해 속에 결국 점령은 한다.


*출처: pinimg.com



물론 그 결과로 인해 루마니아 유전 지대가 안전해졌다지만, 그럼 아프리카 군단 파견의 원래 이유는 어떻게 되는 건가? 완전 무색해질 지경이다.


롬멜의 군단을 발판으로 해 제2차 대전의 판도를 흔드는 거대한 작전을 시도할 수도 있었다. 군단이 연전연승, 이집트로 침투, 카이로를 점령하고 수에즈 운하를 넘어, 중근동 아시아로 올라가는 수순.


시리아나 팔레스타인 같은 데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북상. 소련 남쪽으로부터 내려오는 독일 군과 합류하는 ‘그랜드 스트레티직(대 전략). 그러면 대영제국은 스에즈 운하를 잃으면서 진짜 숨통이 조여진다.


그러나 그것은 히틀러보다 20세기의 한니발이라는 롬멜의 생각이었던 거 같다. 히틀러의 머리엔 애초부터 그런 ‘대 전략적 사고’가 결여돼 있던 게 분명하니까.


아니면 그 병력으로 몰타 점령을 시도하던가, 이집트 수에즈 운하보다 훨씬 가까운 지브롤터를 기습 점령을 했다면? 지중해는 앞문이 막히면서 몰타라는 불침 항모도 침몰, 뒤이어 수에즈 운하도 완전 효용가치를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그 뒤에 오는 건, 영국의 전쟁 수행능력에 가해지는 치명타.


그런게 2년 반에 걸친 사막의 전쟁에 치르느라,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당연히 영국의 몰타 섬과 지브롤터는 건재.



그래도 얻는 게 있었던 히틀러



독일 측에서 보면 얻는 게 하나 있긴 있었다.


롬멜이라는 지휘관과 명성. 여전히 독일 국민의 영웅 아닌가? 그는 독일 군 불패의 상징이며 영국군을 항상 박살 내던 지휘관이었다. 그래서 그가 살아 있는 한 독일은 굳건히 서 있을 것 같았다.


허나 그것도 대략 3년,

허망하게 끝난다.



히틀러, 롬멜까지 죽인다



아프리카로부터 나온 롬멜. 다시 노르망디를 비롯한 해안 방어 사령관으로 취임하는데... 영국군 전투기의 공격에 그만 차에서 튕겨나가 부상을 당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회복 중, 결국 히틀러에게 죽임을 당하니...


반역죄로 연행되는 차 안에서, 음독자살을 강요받는다.


*롬멜의 필살 대 전차 무기 88! 이제는 그냥 버려져 있다. 출처: nolimitszone.com



(5부 끝)




김은기의 커피 테이블 토크


제공: @snaparker



튀니지 전투를 기록한 책을 보면 이런 부분이 나온다. 


1942년 11월 11일이다.

3일 전에 미군 10여만 명이 뒤쪽 모로코와 알제리에 상륙해, 절망이 감도는 상황인데도, 이태리의 나폴리 비행장과 여러 다른 활주로에서 수송기들이 뜨고 있었다.


방향은 북 아프리카!


융커스 Ju-52 수송기에 탄 독일 군 엘리트, 낙하산 부대로 제 5 강하 사냥꾼(엽병) 연대 소속이다. 그들은 훈련과 훈련 속에 다져진 젊은 병사로 모두가 나치 제 3제국은 천년을 간다고 믿는 20대 전후였다.


히틀러가 북 아프리카에서 절대 패배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부분이기도 하다. 때가 이미 황혼을 향해 가고 있는데도...


*독일의 강하 부대가 주로 타던, 3발의 융커스 Ju-52 수송기. 출처: warbirdsnews.com



사실 그때쯤이면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상태였다. 도대체가 그 먼 아프리카의 군단을 어떻게 구하고, 어떻게 연합군에게 패배를 안겨주나?


북 아프리카 가는 길엔 지중해가 있다. 그리고 그곳의 제해권은 연합군 차지.


전쟁의 승패는 보급이 좌우하고, 고된 전투 후의 병사들에겐 휴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보급도 부족하고 휴식도 없이 어떻게 미국과 영국, 뉴질랜드와 폴란드, 남아공과 프랑스, 그리고 프랑스 식민지 병사에다 인도 군까지 가세한 이 쌩쌩한 연합군들한테 이길 수 있나?


진다면 또 거기서 끝이다.

"군인 정신으로 바다를 헤엄쳐 건너와!"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 간 그들은 거의 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둘 중의 하나 일 것이다. 전사 아니면 포로. 아니, 한 가지 더 있다면 부상.


필자는 그래서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망해가고 있는 판에 왜 아까운 물자와 병력을 계속 집어넣는가?

히틀러는 그때도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했나?


*출처: thumbs-prod.si



왜, 그 독재자는 잘못 된 전략을 선택하고 고집을 부렸으며 끝까지 집행했나? 거기엔 자기 나름의 합리적 사고와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사물을 넘겨다보고, 핵심을 꿰뚫어 보며, 수치에 있어서도 발군인 천재가 바로 자기니까. 그런데 아프리카 전투는 그 6개월 뒤, 끝나고 만다.


히틀러의 대 실책이다. 문제는 그런 실책이 계속되고 중첩됐다는 거다.


이렇듯 히틀러에겐 승리의 전략도 있었으나, 얼마 뒤 패배의 전략만을 선택하고 고집한다. 그래서 자칭 천년 제국을, 단지 집권 후 13년으로 단축한다. 바로 그 패배의 대 전략, 7가지 때문이다.


이것은 우모전!



그런 이유로 해서, 필자는 이 시리즈가 제법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우모전’ 다시 말해 ‘우리 모두 전략가가 됩시다.’ 이 시리즈.


전략이나 분석 등의 말은 무겁게 다가올 수 있으니, 되도록 길지 않게 페이지를 줄이고, 라이트하게 쓰려 노력했다. 한 회, 한 회를 읽어가는 가운데, 네티즌 여러분의 전략가 적 소양이 차츰 쌓여갈 거라는 필자 나름의 생각을 갖고...


*나치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 커프타이틀, 소매에 붙는 전역(戰域) 참가 표식으로 당시 매우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한 때 그들은 ‘칸나에’ 들판에서 로마군 6만을 전멸시켰던 한니발의 병사 같았으니까. 출처: afrikakorps.forumc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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