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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색고양이상점 Apr 18. 2024

나 죽이기

2024.04.19 새벽명상


 명상일지를 기록하면서 '나'라는 놈이 늘 붙어나니고 요놈이 마음을 집요하게도 못살게 군다는 자각에 이를 때가 많다. 명상센터를 다니고 있어서 주로 센터에 가서 명상을 하고, 집에서는 안 할 때가 많지만, 집에서도 '명상해볼까?' 하는 마음이 벌컥 일어날 때가 있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고. 새벽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의문이 많이 일어난 상태에서 너저분하게 명상을 끝냈다. 


명상기록 


 '내 몸'이라는 것을 마주하고 앉았다. '지나간 과거의 사건'들도 이미 없는 것이고, '내 몸 내부'의 구석구석도 사실은 매체나 책에서 본 이미지를 '내 몸은 이럴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 만져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 '내 몸에 있는 모든 물질들을 합치면 내가 되나?', 애당초에 '내 몸'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는 건가? 명상을 하면서 의문이 계속 일었다. 과거의 사건들은 기억이라는 형태로 재구성되어 뇌 속에 '나'라는 이미지 전체를 구성한다. 다섯 살 때 유치원 갔다. 7살에 뭐 했다 등등. 이런 문장을 말하기 위해서는 과거 사건 속에 있던 '나'들이 현재의 '나'와 같은 것일 때만 가능하다. 명상을 해보면 지나간 사건 속의 '나'라고 하는 것들은 싹 다 '죽은 것'들이다. '내 몸'이라는 생각 역시, 이미지로 떠오르는 순간 '내 몸'이 아니라 죽은 물질 덩어리로만 보인다. 그 이미지는 내가 어디서 보고 듣고 재구성한 것이므로 또 생각 속의 몸일 뿐이기도 하고. '내 몸'이라고 부르는 세포 전체를 합치면 '나'라는 의식이 갑자기 툭 하고 생길까. 애당초에 '나'라는 말 자체가 비루해 보인다. 마치 없는 것을 있어야 해서 억지로 짜 맞춘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 몸'도 내가 아니고, '기억 속에 있던 '나'도 내가 아니라면, '나는 없다'라는 지경에 이르러야 하는데, 마음이 그곳에 닿지 않는다. 그곳에 마음이 닿는다면, 모든 것들이 풀릴 거라는 느낌이 든다. 사람이 느끼는 모든 감정들은 '내 몸'과 '나'라는 통합된 자아 속에서만 유효한 듯한데, '내 몸'과 '나', '나의 생각' 요딴 것들이 모조리 없는 것이라면 자유라는 것에 다가가는 길이 열리는 듯보인다. 원래도 재미없는 글인데, 오늘은 더 재미없네..시X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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