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글감으로 글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글이라도 쓰지 않고서는 미쳐버릴 것 같을 때부터 쓰기 시작했고, 내 한숨 같은 글에 공감해주는 사람들을 만나 힘을 얻었고, 썼던 시간만큼 자라난 실력으로 일상 생활에서도 심심찮게 도움을 받았던 것이 나의 쓰기 역사이다. 그러던 중 처음으로 강제성을 띄는 글쓰기로 나를 밀어 넣어 보았다.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써야 하기 때문에 쓰는 시간을 보내 보았다. 길었던 경험은 아니었지만 써야해서 썼던 시간들은 즐거움보다는 고통의 몸부림에 더 가까웠다. SNS를 향해 자꾸만 손을 뻗친다거나 달달한 것들을 찾아 먹게 된다거나 온 몸에 좀이 쑤셔 엉덩이를 연신 들썩여가며 썼다. 지금 바로 내 안에서 솟아나는 영감이 아닌 주어진 글감을 쓴다는 것은 이처럼 수고로운 일이었다.
마지막 글감 주제로 ‘무제’가 주어졌다. 마지막에는 어떤 글감이 주어질까 몇 가지 짐작해보기도 했는데 결국 맞히지 못했다. 하지만 글감 없는 글쓰기는 내게 어렵지 않다. 그동안 쭉 해왔던 방식이고 손 끝에서 태어나는 글의 창조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금방 끝날 것 같은 생각에 이번 글쓰기는 일정도 뒤쪽으로 미뤄두었다.
자, 그럼 이제 좀 써볼까, 빈 페이지를 켰다. 파일 제목도 무제라고 저장했다.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양 손을 키보드에 올려 놓은 지 약 5분. 최근 인상깊었던 사건들이 하나 둘 떠올랐지만 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생각으로 엑스표를 치다 보니 쓰고 싶은 글이,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내 글쓰기 역사에 무슨 일이 벌어진거지?
이오덕 선생님의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를 읽고 있다. 거의 평생 동안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신 분으로,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글쓰기의 중요성이 각 장마다 단호한 어투로 강조되어 있다. 그 가운데 빈 페이지 앞에 앉아 있는 오늘의 나에게 속삭이듯 각인된 선생님의 말이 있다. 말장난 하듯 꾸며진 글이 아닌, 작가가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을 이야기하는 살아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던,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 그 말이 자꾸만 생각났다. 내 속에 있는 여러 글감 후보들이 그 분 앞을 통과하지 못해 어떤 것도 커서를 뚫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동안 써왔던 글들은 어떤 글이었나. 현학적인 표현과 그럴듯하게 포장된 경험으로 나를 부풀렸던 거짓된 글들이 떠올라 나는 창피해졌다. 글이 나를 살린다고 믿었으면서도 죽은 글을 쓰고 있었다. 나는 살아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람을 살리는 글이 되기를 또한 간절히 바란다. 한 순간 소비되고 마는 글, 내가 아니어도 쓰여지는 글이 아닌 들이는 에너지가 아깝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 그래서 나는 섣불리 쓰지 못했던 것 같다. 멋있게 쓸 수는 있어도 생명이 있는 글은 아무나 쓰지 못하는 법이니까.
글쓰기와 어린이, 두 단어에 몰두하고 있는 요즘의 나는 지식의 부족이 아닌 지혜와 성품의 결여가 안타깝다. 글쓰기와 어린이 이 두가지 앞에서는 모든 것이 탄로나기 때문이다. 내가 참 사람, 참 어른이 되지 않고서는 살아있는 글도, 살리는 글도 쓰지 못할 것이다. 글을 잘 쓰기 위하여, 아니 좋은 글에 우선하는 것은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이라는 것을 결국 글쓰기가 내게 가르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