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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파감자 May 01. 2022

쓰기를 갈망하는 어린이들

보이글방 수업일지 05.

     세 명의 어린이가 하나씩 들고 놀 수 있는 비눗방울 세트를 다이소에서 1천원에 구입했다. 미세 먼지는 나쁨이지만 따뜻하면서 시원한 것이 봄이라고 주장할만한 날씨여서 내가 다 들떠있었다. 지난 주에 예정돼있던 비눗방울 놀이를 한 주 미룬 이유는 한 어린이의 예정된 결석 때문이었는데, 오늘은 다른 친구가 수업이 임박한 시간에 결석한다는 비보를 전했다. 유독 날이 푹해져서인지 어린이는 장염에 걸렸다고했다. 나를 '누나'라 부르며 스스럼 없이 내 손을 잡아끌고 나뭇가지며 돌이며 주으러다니는 어린이인 크리퍼가 입술을 쭉 내밀고 비눗방울을 부는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이쯤되니 비눗방울의 명이 불운하게까지 느껴졌다. 다음 주에 그 어린이를 만나면 수업 끝에 비눗방울을 쥐어주어야지.

     오늘로 6회를 맞은 수업 동안 단 한 차례의 결석 없이, 다른 친구의 결석으로 수업을 한 주 미룰라치면 (조금 외롭긴해도) 혼자서라도 하겠다며 글쓰기 수업을 강행했던 구름이. 정작 혼자 글을 쓰는 동안에는 심심하다며 친구들의 부재를 꼬집긴하지만, 구름이에게 있어 글쓰기는 애써서 끄집어 내야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분출되고 터져나오는 불가항력 같아 보인다. 항상 글방에 먼저 도착해 장전된 이야기 거리를 쏟아낼 얼굴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한 친구, 어벤져스는 왜 오지 않는 걸까? 마음이 조급해진다. 한 어린이의 결석으로 미뤄진 비눗방울 놀이는 결국 두 어린이에게 버림 받고 흥이 덜한 상태로 남은 한 명의 어린이와 독대해야 한다는 것인가. 어벤져스의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니 수업 시간을 착각하셔서 20분 정도 늦게 도착한다고 하신다. 휴, 그래도 비눗방울 놀이는 같이 할 수 있겠구나. 이쯤되면 어린이들보다 내가 들떠있음이 확실하다.



     수업 시간은 정해져 있고, 먼저 도착한 구름이를 계속 기다리게 할수는 없어 수업을 시작했다. 큰 전지에 타조를 그렸다. 구름이는 아직 타조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올타꾸나 싶어 그림책 <타조는 엄청나>를 소개했고 곧이어 책 속에 나타난 의성어, 의태어를 몸으로 표현하는 활동을 하며 읽을 계획이었다. 오늘은 어린이들이 몸을 쓰기 편하도록 책상을 치운 채 의자만 셋팅해 두었는데 그 덕분인지 구름이는 내가 그려놓은 타조 윤곽 앞으로 성큼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다른 색 크레파스도 있어요?"

 구름이는 조금 늦게 도착하는 어벤져스를 기다렸다 같이 시작하자고 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구름이가 비어있는 타조 몸통을 채색하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니다. 구름이는 함께하는 즐거움을 아는 어린이다. 8살 남아와 10살 여아는 사실 꽤 큰 차이라서 소란스럽고 짓궂게 장난치는 남자 동생들이 귀찮게 느껴질 수도 있텐데 구름이는 그 꾸러기들의 장난을 다 받아주고 질문에 제안까지 한다. 구름이의 예쁜 마음을 나도 함께 나눠갖고 싶어 수업 진도는 생각지않고 그러자고 했다. 기다림의 시간 동안 우리는 타조를 홍학으로 바꿨다. 분홍색 크레파스가 쓰고 싶어서였는지 구름이는 홍학으로 만들자고 했다. 타조든 홍학이든, 우리의 놀이가 이야기 거리가 되고 마음이 모이는 창구가 되었다면 그 뿐. 타조의 홍학화 과정에서도 구름이에게 어떤 느낌이 드는지 물었다. 색이 어떤지, 크레파스 질감은 어떤지, 다리는 무슨 색으로 칠하면 좋을지 같은 질문에 막힘 없이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답해주었다. 나는 좀체 잘 그러지 못하는 자유와 결단. 홍학 채색을 마치고 그 위에 사람까지 그리고나니 바깥에서 "선생니임~"하는 외침이 들렸다. 어벤져스가 멀리서부터 나를 부르며 글방을 향해 뛰어왔다. 나는 그에게 겨우 두 번째 만나는 사람이었다.



     수업 25분 만에 출석이 완료되어 책 읽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책상이라는 허들 없는 셋팅이 구름이 만큼이나 어벤져스에게도 큰 자유를 주었는지 지난 수업보다 두 배 높은 열의와 행동력을 보여주었다.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가 빨간 알약을 먹고 매트릭스 밖으로 나온 것 처럼 어린이들은 쿠키를 먹고 사람에서 타조로 바뀌었다. 몸짓과 소리를 흉내내는 표현이 나올 때마다 각자의 감각으로 단어를 흉내냈다. 열 살 구름이는 주저함이 없었고, 여덟의 어벤져스는 누나의 몸짓을 카피하는 능력이 좋았다. 어차피 어린이들은 서로에게서 배운다. 느린 친구는 자기보다 조금 빠른 친구에게서 배우고, 빠른 친구는 조금 느린 친구에게 자기의 것을 나누며 감각으로 알았던 것을 직관으로 바꾸는 지식의 자기화를 경험한다. 처음 글방을 시작 할 때는 여러명 보다 한 명일 때 진행이 수월하다는 점과 어린이 맞춤형 지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일대일 수업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그런데 수업을 진행하면 할수록 어린이들이 함께일 때에만 드러나는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교사가 아무리 친구가 되어준다고 한들, 또래 집단이 줄 수 있는 배움과 가치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어린이들은 여러 과목과 특기를 습득하기 위해 학원과 과외를 다니지만, 학습 과정이 기술적인 것만을 제공 한다면 학습자가 기계와 다를 바 무엇이겠는가. 나와 비슷한 친구에게 공감하고 다른 친구와는 갈등하며, 실패와 실수가 장려되는 작은 사회 속에서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것이 어린이의 학습에 맺혀야하는 알맹이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하는 입장, 당장의 결과물과 성적보다 10년 후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 그것이 유년기 교육의 모습이 되어야겠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다양한 구성의 어린이들이 한데 묶여 배움의 진동이 일어나는 환경에서 어린이들을 만날 것이다.



     교사의 말이 길어지면 시름만 깊어질 뿐, 어린이들에게 '오감'과 '관찰' 따위를 설명한 후 글방 맞은편 놀이터로 나가 본격적으로 비눗방울 놀이를 했다. "무지개 색이다!" 깨닫자마자 비눗방울은 부는 것 보다 터뜨리는 게 더 재미있다는 것을 발견한 어벤져스. 하트모양 기구를 골라든 구름이는 "이걸로 하면 비눗방울도 하트 모양으로 나와요?" 물었지만 나도 알 길이 없어 해보자고만 답했다. 하트 모양도 별 모양도 비눗방울은 다같은 동그란 모양이었다. 홍학 채색하느라 짧아진 수업 탓에 비눗방울 놀이는 5분으로 만족해야했다. 관찰이 가능한 충분한 시간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린이들이 직접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시가 되는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찰나에도 크게 느끼는 어린이들을 믿을 수 밖에 없다.

 야외에 나왔겠다, 비눗방울도 불었겠다 한껏 흥분한 어린이들이 과연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을까 우려됐다. 글방으로 돌아와 의자만 놓여있어 허전했던 자리에 책상을 옮겨 주고, 각자 노트의 빈 페이지를 펼쳐 연필을 나줄 때 까지도 어린이들은 한껏 들뜬 상태였다. 두 어린이에게 '너희가 눈으로 귀로 코로 손끝으로 느낀 것들을 재료 삼아 시를 써보자'고 했다. 가장 긴장 되는 순간이다. 오로지 이 시간을 위해 책을 고르고 놀잇감을 준비하는 거니까.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것 같던 두 어린이는 연필을 잡자, 마치 시공간이 바꼈다는 듯 이내 침묵과 고요 속으로 들어갔다. 뭐지, 어떻게 된 일이지? 지난주에도 글 쓰는 내내 단어 두 개 쓰고 수다 떨고, 반 줄 쓰고 훼방놓기 바빴던 아이들인데... 두 어린이는 비눗방울을 가지고 논 5분 보다 적게 걸려 한 편의 시를 뚝딱 만들고는 다른 글도 써도 되냐고 물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두 어린이는 야심차게 준비한 비눗방울 보다 '그냥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에 골몰하며 훨씬 길고 풍성한 글을 완성시켰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할 때 말이 길어지고 눈이 반짝인다. 20년 넘은 나이차를 해석했어야하는 선생님은 비눗방울로 이 어린이들의 마음을 손쉽게 빼앗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애당초 글쓰기를 자유로운 자기 표현 수단으로 삼게 해주고 싶었으니 어린이들이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게 해줬어야했다. 오늘의 경험은 앞으로의 커리큘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고, 비눗방울 놀이 세트는 다음주에 올 크리퍼 손에 들어간다해도 영 힘을 못쓸 것 같다. 역시 불운한 게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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