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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 변호사 Mar 11. 2024

이처럼 사소한 것들

독서메모(842)

저자 :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

역자 :  홍한별

출판연도 : 원서 - 2021, 역서-2023


'미스 트로트' 같은 경연 방송 프로그램이 글쓰기 분야에도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글쓰기 경연 프로그램은 과제(소재)를 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소재는 다음의 신문기사다.



아일랜드에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카톨릭 교회와 정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수녀원 부설의 막달레나 세탁소가 전국적으로 산재하여 있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미성년자 미혼모들은 이곳으로 갔다.  그 중에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소녀들도 있었다. 수녀원에서는 그들과 그들의 아기를 돌봐줬다.


미혼모들은 세탁소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그들은 세탁소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제대로 노임도 받지 못했고 헐벗은 채로 강제노역을 당했다는 것이다. 많은 미혼모와 아기들이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사망하였고, 자살한 소녀들도 많았는데 그 숫자는 확인된 것만 해도 수천명에 이른다.


6개월 이내에 위 기사 내용을 소재로 하여 A4 용지 100쪽 내외 분량의 소설을 완성하라는 것이 출제 문제다.


권위 있는 출판사에서 출간된 소설이 1권 이상 있는 작가들만이 참여할 수 있다. 작가의 국적, 인종, 성별, 나이는 따지지 않는다.


경연 기간은 6개월이다. 첫 달은 각자 줄거리를 준비하여 와서 발표하고 둘째 달은 어떤 방식으로 그 줄거리를 짤 것인가를 발표하고 셋째 달은....


발표는 공개적으로 하고(방송으로 중계되고) 심사위원들이 각자  자기의 의견을 말하고 평가점수를 준다. 시청자 투표(방송국 놈들은 국민투표라고 부르면서 오바하는데 시청자 투표가 옳은 말이다)의 점수도 반영되어야 한다. 가끔은 작가들끼리 1:1 대결을 시켜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회전을 거듭하면서 탈락자들이 생기고 최후에 남은 작가 1인에게 거액의 상금(미스 트로트는 3억원을 주던데...)을 지급한다.


낮술도 안 마셨는데 백일몽을 꾸고 있는 이유는, 만일 그런 경연이 있다면 위 기사를 소재로 쓴 이 소설(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작가 클레어 키건이 2등과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우승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영화 '말없는 소녀'를 보면서 원작 소설이 궁금해졌다. 원작소설인 '맡겨진 소녀'가 전자책으로 나오지 않아서 인터넷 서점에서 종이책을 주문하게 되었다. 이 소설도 셋트로 구성하여 함께 팔고 있었다. (맡겨진 소녀를 읽고 종이책 보는 재미를 더 누리고 싶어서 독서대를 구매했다. 요즘 독서대는 눈높이에 책을 둘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맡겨진 소녀'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 두 권 모두 100쪽 밖에 안되는 분량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작가가 장편을 쓸 능력이 안돼서인지, 아니면 장편을 쓰지 않아도 할 말 다할 수 있는데 굳이... 하는 마음에서 100쪽 짜리 소설을 계속 써내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후자 같다.


'맡겨진 소녀'를 읽고 나서도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그것보다 더블로 강력하다. 맡겨진 소녀는 2010년 작품이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2021년 작품이다. 클레어 키건은 10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던 모양이다.


'맡겨진 소녀'의 번역자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번역자가 다르지만 두 분의 번역 모두 좋았다. 출판사가 번역자를 공들여 섭외하고 교정 작업도 열심히 한 것을 보면 명작에 대한 예우를 갖춘 셈이다.


번역자는 옮긴이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 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 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이 소설의 첫 문단이다. 첫 문단을 어떻게 번역할지에 대해 클레어 키건은 이런 조언을 해주었다.


"'헐벗다', '벗기다'. '가라앉다', '북슬북슬하다', '끈', '흑맥주', '불다' 등의 단어를 써서 임신하고 물에 뛰어 들어 죽은 여자를 암시하고자 했고 가능하다면 그런 뉘앙스가 번역문에도 유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설가 존 맥가헌은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가 물에 빠져 죽은 시신의 암시를 의식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저는 좋은 이야기의 기준 가운데 하나는 독자가 이야기를 다 읽고 첫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도입 부분이 전체 서사의 일부로 느껴지고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느껴진다.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뒷부분에 가서 깜짝 놀랄만한 반전도 보여준다. 범죄소설이 아니라서 방심하다가 완전히 허를 찔렸다.^^


앵무새 죽이기(하퍼 리)가 고전이 된 이유 중 하나는 주인공을 통하여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집 앞의 삼계탕집 벽에는 이렇게 써 붙여 놓았다.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삶이 어떤 것인지는 많이 못 배워도 안다. 실천이 어려운 이유는 올바른 삶과 자기의 이기심과 충돌되기 때문이다. 99%의 사람들은 그럴 때 자기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간다.


그러나 '앵무새 죽이기'의 주인공과 이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주인공은 올바른 삶을 택한다.


이 소설도 강력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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