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떠나는 날
[5월 12일(월)]
5월 12일부터 6월 5일까지. 25일간의 여정이다. 이번에는 제법 긴 여행이다.
먼저 로마로 간다. 로마에서 렌트를 하여 일주일 동안 자동차로 토스카나 지방을 여행할 것이다.
5월 19일에 로마로 돌아와서 렌트카를 반납한 후 버스를 타고 치비타베키아 Civitavecchia 항구로 간다. 그 때부터 14박 15일 간의 지중해 크루즈 여행이 시작된다.
토스카나 여행에 대해서 아직 아무 계획이 없다. 숙박장소도 예약하지 않았다. 예약해놓은 숙박장소가 있으면 거기에 일정을 맞춰야 하므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5성급 호텔이 아닌 한, 숙박장소의 상태를 인터넷만으로는 제대로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토스카나는 어디를 가도 5월은 아름답다고 정평이 난 곳이다. 게다가 임기응변에 능한 아내가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그냥 자유롭게 이리저리 다닐 것이다.
유심 교체를 위해 일찍 공항에 왔다. 연휴가 끝나서인지 한가했다. SK 텔레콤에서는 사람들을 많이 동원해서 교체작업이 빨리 진행되도록 해놓았다. 교체작업은 금방 끝났다.
아내의 짐가방이 무게 초과에 걸렸다. 1kg 정도가 초과된다며 KAL 직원은 가방에서 짐을 좀 빼서 휴대 짐가방에 넣으라고 친절하게 안내해줬다. 귀찮아서 나는 초과요금을 내겠다고 했다. 10만원이라고 했다. 다시 생각하니 1kg 정도의 짐을 더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한 달 동안 최대(24GB) 데이터 로밍 가격이 79,000원인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줄에서 빠져나와서 짐을 덜어냈다. 아내의 휴대 짐가방은 지퍼가 잘 안 잠겨질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다시 가서 체크인 했다. 이번에는 통과했다.
지난 번 일본여행을 갈 때 인천공항 스마트 패스 등록을 했다. 그 이후로 잊어버렸는데 KAL 모바일 탑승권을 체크인을 하니까 인천공항 발신 카톡 메세지가 왔다. 스마트패스 (자동)등록이 되었고 스마트패스 전용 출국장 게이트로 가란다. 스마트패스는 얼굴 인식 카메라에 내가 얼굴을 맞추면 여권이나 탑승권 제시 없이 바로 짐 검색(보안) 구역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짐 검색 과정에서 아내의 가방이 정밀검사 대상으로 체크됐다. 가방을 열었다. 화장품이 가득 담겨있는 케이스가 있었다. 액체류는 기내반입 금지다. 물론 아내도 잘 알고 있다.
아내는 어제 밤을 꼬박 새면서 짐을 쌌는데 이것, 저것을 넣었다, 뺐다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정신이 없어서 화장품 케이스를 휴대 짐가방에 넣어버린 모양이었다.
짐을 검색한 직원은 도로 나가서 위탁수하물로 부치고 오든지 아니면 폐기처분하겠다고 하였다.
아내는 나가서 부치고 오겠다고 하였다. 그 조그만 휴대 짐가방을 추가로 부치는데 13만원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예 큰 가방을 하나 더 가져오는 것이 나을 뻔 했다.
짐을 추가해서 배불뚝이가 된 가방을 들고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수고로움을 덜게된 것으로 돈값은 했다고, 쓰라린 가슴을 달랬다. 전쟁에서 전투로 죽는 병사도 있고 헬리콥터 사고로 죽는 병사도 있다. 후자를 collateral damage라고 부른다. 여행에서도 이런 부수적 손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비행기에 탑승했다. 로마까지 무려 13시간 남짓 걸린다. 좁은 이코노미 좌석에서 그 긴 시간을 부동의 자세로 견뎌야한다.
1년 전에 예약하면서 마일리지로 비즈니스 클라스 업그레이드 신청을 했는데 결국 불발됐다. 사고 싶은 물건이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내가,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절실하게 바랄 때가 있다. 여행을 할 때이다. 비즈니스 클라스 항공권을 자연스럽게 사고, 호텔 방값 따지지 않고 아무 호텔이나 투숙할 수 있으면 좋겠다.
중앙에 세자리 있는 좌석에서 내가 가운데에, 아내가 오른쪽 통로에 앉았다. 아내는 입국신고서 작성을 위해서 필기도구를 하나 가방에서 꺼내 놓자고 하였다. 내 왼쪽에 앉은 단아하게 생긴 젊은이는 작은 목소리로 정중하게 말했다. "이탈리아 들어갈 때는 입국신고서를 작성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청년은 계속해서 소리 없는 배려를 해줬다. 예를 들어 곤히 자고 있는 아내를 깨우기가 뭣해서 다리 위로 넘어 가려다가 너무 공간이 협소해서 포기했다. 그 움직임을 눈치챈 청년은 조용히 일어나더니 자기 쪽으로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잘 자란 청년이었다.
나는 종기 제거 시술을 받은 것이 완전히 낫지 않아서 술이 금지된 상태였다. 사실은 일찍 나을 수도 있었는데 객기를 부려 과음을 한 탓에 재시술을 받았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와인이든, 맥주든 알코올은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결과 비행하는 동안 몸 컨디션이 상당히 좋았다. 다음에 탈 때는 기내식을 절반만 먹는 도전을 해 볼 생각이다. (한 번 더 생각하니 자신이 없다. 안 그래도 기내식은 양이 적은데…)
로마에 도착했다. 진짜 입국신고서, 뭐, 이런 번거로운 절차가 없었다. 더구나 우리 비행기에 탄 사람들은 일사천리로 입국장으로 통과시켜 주었고 반면에 다른 비행기에 타고 온 사람들(주로 동유럽, 중동, 인도 사람들 같았다)은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줄이 엄청 길었다. 국가에 따라 차별할 리는 없는 것 같은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여권을 판독기에 입력하고 카메라에 얼굴을 비추는 과정이 있었다. 가끔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를 대비하여 제복을 입은 여자 공무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여공무원은 스피커를 크게 하여 핸드폰으로 뭐를 계속하여 보면서 껌을 질겅질겅 씹어댔다. 중간에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나오면 귀찮은 듯이 손짓으로 교정해 줬다. 어떤 중늙은이가 모자를 쓰고 카메라를 응시하여 진행이 되지 않자 자기 옆에 있는 젊은 한국 아이에게 모자 벗는 시늉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 영감을 가리켰다. 그 젊은 한국 아이는 할아버지 모자 벗으세요 라고 외쳤다. 음, 가성비가 쩌는 공무원이다.
입국비자를 찍는 덩치 큰 남자 공무원도 걸작이었다.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채, 사람들이 여권을 펼치면 거기에 스탬프를 쾅, 쾅 찍어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자동 스탬프 기계였다.
출국수속 시간이 기록적으로 짧았다. 대형 보잉 비행기에 꽉꽉 차서 타고 온 승객들이 모두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데 걸린 시간이 30분이 채 되지 않았다,
유럽의 화장실 인심은 고약하기로 악명 높다. 그러나 로마 공항의 화장실은 쾌적했다. 최근에 레노베이션을 했는지 새로운 아이디어도 도입되어 있었다. 손을 갖다 대면 비누거품이 나오고, 물이 나오고, 더운 바람이 나오는 3종 세트로 만들어진 구간이 이어져 있었다.
이제 신경쓰이는 일을 할 차례이다. 자동차를 렌트하는 일이 그것이다.
유럽관광객을 당황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 대표적인 일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소매치기고 나머지 하나는 렌트카 업체의 횡포다.
렌트카 업체에서는 예약해놓은 차가 없다고 시치미를 뗀다. 대안으로 같은 가격에 나쁜차(작은차)를 주거나 터무니 없이 비싼 차를 제시한다.
나름대로 대비하기 위하여 아내는 제일 명성이 있는 허츠(Hertz)에 예약을 했다.
허츠사 직원은, 아니나다를까 최신형 벤츠가 방금 입고됐다면서 할인을 해줄테니 그 차를 쓰라고 했다. 아내는 원래 예약해놓았던 차의 가격정보를 핸드폰에서 찾았으나 빨리 찾아지지 않았다.
허츠사 직원은 집요하게 벤츠를 권했다. 집 떠난지 24시간이 다 된 상태에서 지칠대로 지쳤다. 더구나 언어가 자유롭지 못했다. 이탈리아 억양이 심한 영어를 쓰는 그 직원의 말을 알아듣기도 쉽지 않았고 나도 말하는 영어 능력이 신통치 않았다.
삼성 핸드폰은 통역앱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한국에서 연습도 했고 이탈리아어를 다운받아서 인터넷이 안될 때도 통역기능이 가능하도록 조치해 놓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것은 조용한 방에 단 둘이 마주 않아서 천천히 이야기할 때나 쓸모가 있는 것이었다. 사방에서 소리가 난무하는 시끄러운 곳에서 내 말만 분리되어 입력이 되지 않았다. 통역앱이 있으니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은 현재 기술수준으로서는 망상에 불과하다.
결국 벤츠를 렌트하는데 동의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하이패스 단말기 같은 것을 대여받았다. 이것이 없으면 이탈리아 고속도로를 다닐 때 통행료를 일일이 내야 하는데 신용카드 결제가 가능한지도 모르겠고 현금을 내야 한다면 더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단말기의 대여료가 하루에 15유로다. 도대체 단말기의 대여료를 일수(日數)에 비례하여 받는 것도 화딱지가 나지만 금액도 환상적이다. 나는 보험을 full cover로 들었다. 보험료는 아끼지 말자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여행자보험도 제일 좋은 것으로 들었다. 사고가 날 확률은 적지만 만에 하나 사고가 났을 때를 생각해서이다.
결국 처음에 우리가 예약하였던 오펠 SUV 가격보다 500유로 정도 더 추가되었다. 최종적인 가격은 1,271.84 유로가 되었다. 불과 일주일(5월 12일~19일) 동안의 렌트비가 200만원이 되는 것이다. 스타트부더 암울하였다.
렌트카 주차구역을 찾아갔다. 하얀색의 SUV였다. GV70 사이즈다. 누적 주행거리가 불과 24km였다. 핸들에는 아직도 먼지 방지 비닐이 덮여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옵션은 아무 것도 없는 그야말로 깡통차였다. 의자 등받이를 조절하는 것도 의자를 앞뒤로 움직이는 것도 모두 손으로 핸들을 돌려서 조작해야 했다.
예약해 놓은 공항근처의 호텔(Hotel Isola Sacra)로 향했다. 5km 정도의 거리다. 체크 인을 하고 방에 들어가니 밤9시 30분쯤 되었다. 피곤이 몰려왔다. 급하게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