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고은 배우를 영화 <차이나타운>에서 처음 봤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차이나타운 어둠의 여왕 '엄마' 김혜수에게 입양된 '일영'역을 맡았다. 쌍욕을 입에 달고 살며 사람을 데려다 죽이는 잔인한 역할이었다. 잔인한 장면을 유달리 싫어해서 완벽한 각본으로 유명한 영화 <신세계>, <아저씨>, <내부자들>도 아직 못 본 내가 왜 이 영화는 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차이나타운> 역시 설정과 장면들이 제법 잔인한데 말이다. 여하튼 우연히 보기 시작해서 끝까지 끄지 않고 다 봤다.
예쁨은 전혀 필요 없는 이 역할은 김고은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처음 보는 배우인데 관록의 김혜수와 붙어도 연기력이 꽤 괜찮았고, 앞으로도 멜로 이외의 장르에서 많이 보게 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 그녀가 정통 멜로인 <도깨비> 여주인공이라고 했을 때 내가 본 그 배우가 맞는지 다시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여자지만 멜로드라마에선 여자 주인공이 누군지를 먼저 본다. 멜로의 경우 남자 주인공은 외모가 별로라도 감정 이입이 가능한데 여자 주인공이 예쁘지 않으면 이상하게 몰입이 안 된다. '미녀와 야수'는 있지만 '미남과 야수'는 없는 것처럼 같은 여자지만 나 역시 아름다운 여성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모습이 훨씬 환상적으로 보인다. 물론 현실 말고 드라마에서 말이다. 나도 아름답지 않은 평범한 외모로 사랑을 하고 결혼도 했지만 드라마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현실과는 다른 판타지를 보고 싶다. 이건 말 그대로 드라마니까. 우리가 바쁜 와중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이 세상에 판타지가 아직 존재함을 보고 싶어서이기도 하니까.
도깨비, 저승사자, 지은탁이 찍은 사진을 보면 셋 중 누가 제일 덜 예쁜지 알 수 있다. 지나치게 예쁜 남자 배우 둘을 캐스팅한 탓(?)에 막 안 예쁜 건 아닌 김고은 배우가 손해를 본 것 같긴 하다. 극 중에서 도깨비 역시 '난 예쁜 여자를 찾는 게 아니다'는 말을 잊을만하면 내뱉는데 내 귀엔 이것이 여주의 평범한 외모를 커버하는 작가의 센스로 들렸다.
사실 지은탁은 꼭 예쁠 필요 없는 역할이긴 하다. 그래도 제작진이 수많은 여배우 중 김고은 배우를 선택한 이유는 궁금하다. 왜 그녀를 선택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진짜로 궁금한 거다. 천 년 동안 소멸하기만을 바라며 가슴에 박힌 검을 빼줄 신부를 기다려온 도깨비가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게 만들 만큼 사랑하는 여자이기엔 좀 부족한 느낌이다. 그것이 꼭 외모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청자 입장에서는 몰입감이 다소 떨어진다. 아, 소멸을 간절히 바라 온 도깨비가 정말 저 여자를 두고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겠구나, 라는 감정이 들지 않는 것이다. 기존에 앞부분만 보고 더 이상 진도를 빼지 못했던 이유 중 여주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나는 중국 웹소설 번역을 하는데 거의 모든 언정 소설(로맨스)엔 공식처럼 적용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여주는 '눈빛 하나로 남자의 뼈를 녹여버릴 정도로'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원래 못생겼던 여주조차 환생이나 영혼 체인지 등을 통해 천하절색으로 바뀐다. 그만큼 여주의 아름다운 외모가 흥행을 견인하는 데 필수라는 고정관념이 존재하는 걸 수도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밝은 성격, 여고생만이 가질 수 있는 천진난만함, 착한 마음씨 다 좋지만 남자를 녹이는 외모는 갖지 못한 지은탁이 과연 도깨비를 영원한 사랑 안에 가둘 수 있을까. 답은 가둘 수 있다로 정해져 있지만 그 과정이 못내 궁금하다. 어떻게? 그리고 내가 그 과정에 감정이입을 하며 푹 빠질 수 있을까? 내게는 이게 관전 포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