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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셜리 Feb 13. 2024

버퍼링으로 시작한 호주 여행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2020년 1월 28일 포르투갈 여행을 마지막으로 나의 해외여행은 코로나의 창궐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장장 4년의 시간이 흘러 2024년 1월 10일 나의 여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돌이켜 보면 쉬웠던 해는 없었지만 2023년은 내 인생에 가장 힘든 한 해로 기억될 시간들이었다.

힘든 일들이 조금씩 정리될 무렵이었던 10월의 어느 날 불현듯 여행을 가야겠다는 마음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용암이 솟구치듯 세차게 튀어 올랐다.


어디든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일단은 가까운 발리나 치앙마이로 가기 위해 비행기표를 알아봤는데, 생각보다 비행기표가 너무 비쌌다. 내가 가고자 하는 시기가 1월이라 아이들 방학이랑도 겹치고 겨울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따뜻한 나라로 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인 것 같았다.


이왕 가려고 마음먹은 거 돈을 좀 보태더라도 좀 더 멀리 가볼까? 장거리 비행이 두려워 가까운 동남아를 생각한건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제 나이도 점점 들어가는데 다만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멀리 가야 하지 않나? 이미 유럽을 다섯 번이나 가봤지만, 아직 안 가본 곳이 많으니 이번엔 크로아티아나 그리스로 가볼까? 여기저기 블로그를 찾아보고 비행기 티켓이며 뭐며 견적까지 다 내봤는데, 딱 한 가지가 영 찜찜하게 내 발목을 잡고 있는게 있었다. 바로 유럽의 날씨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처럼 겨울이라도 날씨가 좋은 나라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유럽은 겨울이 우기와 마찬가지여서 비도 자주 오고 해도 일찍 져서 돌아다닐 시간이 길지 않다. 게다가 크로아티아나 그리스는 완전 관광지라 비수기인 겨울에는 문을 열지 않은 곳이 많다는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 할 것인지 아님 다른 대안을 찾아볼 것인지 고민하던 차에 갑자기 호주가 뇌리를 스쳤다. 우리나라랑 정 반대인 나라! 우리나라가 한 겨울일 때 한 여름인 나라! 비행시간 10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한 번도 안 가본 나라라 구미가 확 당겼다.


그래! 호주로 가자! 비행편을 알아보니 3개월이 채 안 남은 시점에다 겨울 성수기라 비행기 값이 비쌌다. 조금 더 찾다 보면 더 싸게 표를 구할 수도 있겠지만 급한 성격과 귀차니즘으로 인해 바로 결정을 해버렸다. 직항으로 갈까 생각했었지만,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싱가포르를 경유하는 일정이 있어서 그걸로 정했다. 비행노선은 아시아나를 타고 싱가포르에서 1박 스탑오버를 하고, 다음날 저녁에 콴타스를 타고 호주 브리즈번으로 들어가는 일정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가는 해외여행이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아보고 계획을 짜야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싱가포르(1박)-브리즈번(1박)-골드코스트(2박)-멜버른(3박)-시드니(5박) 총 12박 14일로 일정을 짰다. 도시 간 이동이 많아서 국내선까지 총 6번이나 비행기를 타야 하는 일정이라 부담이 되긴 했지만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르는 호주 여행이니 가보고 싶은 곳은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결정을 해버렸다.


호주는 ETA비자도 미리 받아야 하고, 다른 나라에 비해 의약품이나 음식물 등의 반입 절차가 까다롭다.

호주 여행 카페를 날마다 드나들며, 비자가 거절된 줄 모르고 공항에 갔다가 비행기를 못 탔다는 이야기부터 입국할 때 가방까지 다 열어서 검사를 하고, 갖고 간 컵라면(소고기 그림이 있는)이며 음식도 압수당했다는 후기를 보고 이 나라는 돈을 쓰러 가준다는 데도 뭐 이리 까다롭게 구는 건가 툴툴거리며 준비를 했다.


무려 한 달 전에 심장을 졸여가며 ETA 비자 승인을 받고, 의약품 리스트를 만들고, 혹시나 공항에서 잡힐까봐 컵라면도 챙기지 않았다. 트래블월렛 카드와 최소한의 환전, 우버 어플 깔기, 호주의 강력한 태양에 맞설 선크림, 선스틱, 모자 자, 얇은 긴팔의 옷 등을 준비했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이번 여행은 이상하게 설렘보다는 불안감이 조금 더 컸다. 출발 전날 밤부터 심장이 두근두근... 잠이 너무 안 와서 새벽에 순심환을 털어 넣고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행히 오후에 출발하는 비행기라 새벽 공항버스는 아니었고, 12시 20분쯤 공항에 도착해서 싱가포르 입국신고서를 온라인으로 신청하고, 셀프체크인을 했다.


4년 전만 해도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이번에 가니 공항 카운터에 체크인을 해주는 직원이 따로 없다. 무조건 기계에 셀프체크인을 하고 위탁수하물도 직접 붙여야 한다. 우린 싱가포르를 경유를 하는 거라 좌석만 미리 지정해 놓고 온라인 체크인을 따로 안 했는데(보통 경유는 공항 카운터에서 직접 체크인을 한다고 함), 체크인하러 줄을 서려니까 경유든 뭐든 무조건 셀프체크인을 하고 오란다. 일단 하라는 대로 셀프체크인을 하고 짐을 부치려니 계속 안되고, 카운터로 가라는 메시지가 떠서 결국 카운터 끝에 있는 직원을 만나 다시 체크인을 하고 짐을 부치고, 경유 항공편 티켓을 받았다. 그러길래 우리가 직접 가서 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에휴... 잘 모르는 직원 때문에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


짐을 맡기고 간단하게 김밥과 떡볶이로 점심을 먹으려고 시켰는데, 정말 맛이 없다. 고추장 물에 살짝 몸만 담근 것 같은 떡볶이에 물이 한강인 라면이라니... 외국인들이 이걸 먹고 한국의 떡볶이, 김밥이 다 이런 맛이라고 오해할까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무튼 한국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실패였다.

어딜 가나 줄을 잘 못 선다. 항상 내가 서는 줄이 제일 길다. 이번에도 역시 내가 선 출국심사 줄이 제일 길었다. 게다가 우리 짐만 이미지 스캔이 안 된다며 기다리고, 다시 하고... 평소에 잘 걸리지 않던 몸스캔도 하고.... 뭔가 순조롭지 않다.


국적기들은 대부분 지연출발이 거의 없는 편인데, 기내식이 안 실려서 20분, 또 활주로가 혼잡해서 20분.

그래도 국적기의 국룰인 비빔밥을 먹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으며 6시간의 비행시간을 버텨보려는데, 오랜만의 비행이라 그런지 좌석도 불편하고 너무너무 힘들다. 예전에 12시간의 비행을 대체 어떻게 버틴 건지...

온몸을 비비 꼬아가며 도착한 싱가포르. 싱가포르 입국신고서를 준비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응? 그거 온라인으로 하면 끝나는 거 아니었어? 아까 신고할 때 마지막에 PDF로 저장을 하긴 했었는데 다시 찾아보니 파일이 없다. 어쩌지? 이메일로도 받았던 기억이 있지만 싱가포르 유심을 아직 사지 않은 터라 공항 와이파이로 이메일에 접속해서 보여줘야 하나? 혹시라도 입국이 안될까 봐 심장은 두근거리고, 머릿속으론 잘 되지도 않는 영어로 영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입국신고서를 작성해서 이메일로 받았으나 파일 저장이 안 됐다. 이메일로 들어가서 보여줘도 되느냐?'라고 말이다.


공항에 도착해서 공항 와이파이로 이메일에 접속해서 바코드를 캡처해 두고 입국심사 줄을 섰는데 싱겁게 자동입국심사로 끝나고 입국신고서는 묻지도 않는다. 자동입국심사다 보니 여권에 도장도 찍어주지 않는다.

작년에 여권갱신할 때 일부러 면수가 많은 걸로 했는데 소용이 없게 됐다.


싱가포르에 하루 밖에 있지 않다 보니 유심을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한 명만 유심을 사고 핫스팟을 켜서 와이파이를 같이 쓰기로 했다. 나름 신박한 아이디어라며 신나서 유심을 사러 갔다.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이라고 써 있는 곳에 유심 팻말이 있어서 왠지 믿음이 가서 유심을 다 끼우고 얼만지 물어보니 50달러란다. 7일짜리 유심이 5만 원?? 한국에서 알아봤을 때는 만원이 조금 넘는다고 했는데?? 눈탱이를 맞은 건가? 미리 가격을 묻지 않았던 우리가 잘못이었다. 속이 쓰리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치고,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라서 택시든 뭐든 타고 가야 할 거 같아서 물어보려는데, 싱가포르는 우버가 아니라 그랩을 쓴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뇌에 버퍼링이 걸린 건지 말로는 우버를 어디서 타야 하냐고 묻고 있었다. 직원은 싱가포르는 우버는 없고, 온리 택시밖에 없다며 자기가 택시를 불러준단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30분 정도 걸리는데 택시비는 60달러. 이상하다 분명 그랩이 있다고 들었는데, 왜 택시 밖에 없다고 하는 거지? 생각은 그랩으로 하고 말은 우버로 나오고....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불러주는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유심에 택시비에 눈탱이를 두 번이나 맞은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였는데 막상 싱가포르의 화려한 야경을 보니 나빴던 기분이 사르르 녹는 느낌이다. 택시도 일반 택시가 아니라 리무진이라 엄청 럭셔리했고, 기사님이 여기는 어디고, 저기는 어디고 내일 여기를 가면 좋고... 마치 야경투어를 하는 느낌이다. 친절한 기사님 덕분에 싱가포르 야경을 제대로 구경했으니 60달러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호텔에 가서 일단 샤워부터 하려고 욕실에 들어갔는데, 일부러 챙겨간다고 챙겨간 게 바디로션만 2개 가져왔다. 생긴 게 똑같아서 헷갈렸나 보다. 호텔에 있는 샤워젤로 샤워를 하려는데 어? 이번엔 속옷을 안 들고 들어왔다. 대체 나 왜 이러는 거니?~~~~


너무 오랜만의 해외여행이라 시작부터 뭔가 버벅버벅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어느 한 가지도 순조롭지 않다.

그래도 난 이렇게 생각하련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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