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수 있는 것을 잃어버리는 건 다행이야
1년 전, 내가 에어팟을 버스에서 잃어버리고 찾지 못해 망연자실한 적이 있었다. 버스에 타면서 에어팟을 한쪽만 꺼내서 들었는데, 목적지에 내려서 헬스장에 도착했는데 뭔가 쌔한 느낌이 드는 거지. 한쪽 귀에는 에어팟이 있는데 나머지 케이스하고 다른 한쪽이 주머니에 없는 거야. 앗, X 됐다...
평소에는 내가 가방을 가지고 다녀서 에어팟을 잘 안 들으면 가방 주머니에 넣어놓곤 했다. 그런데 마침 그날은 내가 휴가를 써서 하루 쉬는 날이라 딱히 집에서 나갈 일은 없었고 잠깐 헬스장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선 터라 그냥 재킷만 걸쳤는데... 주머니가 좀 널널한 옷이었나 보다. 슬쩍 넣다가 빠졌는지... 주머니는 물론 온 데 간데 없어진 내 에어팟 프로. 그냥 에어팟도 아니고 얼마 전에 새로 마련했던 에어팟 프로였다. 나올 일 없었는데 없는 일 만들어서 이렇게 잃어버리는구나 싶었다.
진짜 길거리를 한 시간 넘게 돌아다니고, 버스 회사에 전화를 하고, 내가 탔던 버스 번호를 찾아서 다시 타보고 하는 등의 잃어버린 내 에어팟 프로를 찾으려는 노력을 수없이 했다. 하지만 그걸 찾을 수가 있나. 그렇게 집에 와서 초초초초 다운되어있던 내 기분. 하루 종일 축 쳐진 내 모습을 보고 계신 어머니가 해주신 말이 아직까지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돈으로 다시 살 수 있는 것을 잃어버렸으니 다행인 거지.
다시 사거나 구할 수 없는 게 진짜 소중한 거야.
살 수 있는 걸 잃어버려서 다행이다.
진짜 매일 잘 쓰는 에어팟을 잃어버려서 너무 슬프다고 생각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그래도 꽤 위안이 되었다. 만약 이게 내가 열심히 작업한 회사 업무가 담긴 파일이라도 잃어버린 거였다면? 건강을 잃어버린 거였다면? 친구 관계를 잃어버린 것이었다면? 사랑과 우정, 행복을 잃어버린 것이었다면? 그래도 새로 살 수 있는 기성품을 잃어버린 게 다행이었다.
너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면 내가 사주마.
사줄 수 있는 내가 있는 게 어디니?
최악의 휴가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 다시 구할 수 있는 것을 잃어버린 조금 운 없는 날이었다. 심지어 어머니가 자기가 사주시겠다고 하셨다. 내가 잃어버린 그 자체가 기분이 나쁜 것이었고 그래서 기분이 나쁜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랬다. 살 수 있는 것을 잃어버려서 다행이었다. 난 내가 충분히 긍정적인 줄 알았는데, 아끼는 물건 하나에 이렇게 무너져버릴 뻔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몇 마디 말과 함께 나를 끌어올렸고, 이 말은 시간이 꽤 지난 지금도 아직 내 머릿속에 깊이 남아있다.
돈을 더 벌어서 다시 사면되는 에어팟을 잃어버린 것이지, 다시 살 수 없는 우정, 행복, 사랑 등을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지금 나에게 진정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들은 이렇게 어디 가서 단 시간에 사 올 수 없는 것들이다. 참 다행이다. 감사함을 알았다.
* 사실 다음 날 당근마켓에서 한쪽과 케이스 파시는 분을 발견해서 바로 사긴 했다는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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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회사에서 디지털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요가와 글쓰기, 일상을 재미있게 만드는 소소한 기획, 문화 예술 등에 관심이 많은 직장인입니다. 궁금한 점 및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면,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kimpaulie) 또는 이메일 (karis86@gmail.com)로 언제든지 편하게 문의 부탁드립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