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어머니는 며칠 후의 본인 생일을 맞아 이모들과 식사 약속을 잡으셨다. 경복궁이라는 한식집을 예약하고 이모들과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하실 생각에 설레어하셨다. 생일날 그 음식점에 가면 맛있는 미역국을 추가로 준다고 하시며 이렇게라도 미역국을 먹어야지 하셨다. 약간은 마음에 걸리는 말이었지만 그렇게 넘어갔다.
그런데 아뿔싸, 약속 당일 벌어지면 안 될 일이 벌어졌다! 조카 어린이 집에 코로나 확진자가 건너 있었나 보다. 조카를 자주 봐주시던 어머니께서도 약속 당일 아침에 코로나 검사를 하셔야 하는 상황이었고, 결국 그 식사 자리에 가시지 못하셨다. 어머니께서 아쉬워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 마음이 내 마음에도 전해졌다.
아, 그럼 내가 한 번 미역국을 끓여볼까?
사실 나는 종종 요리를 한다. 손재주가 아예 없지는 않기에, 작정하고 레시피 보면서 따라 해보려 하면 대강 그럴듯하게 맛을 낼 수는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한 번 도전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맛있게 끓인 미역국을 드시면 어머니가 좋아하시겠지?
작전은 이랬다. 이왕 하는 거 서프라이즈로 해야겠다! 어머니가 결혼식 때문에 외출을 하시는 시간에 빨리 장을 보고 와서 미역국을 끓이고, 그 사이에 동생이 조카들과 함께 집에 와서 숨어있어야지. 그리고 어머니가 집에 오시면 케이크를 들고 있다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면서 서프라이즈~!
오후 4시 결혼식을 참석하러 2시 반쯤 부모님이 나가셨다. 그때부터 내 행동은 바빠졌다. 근처 마트에 가서 바삐 장을 봤다. 전날 저녁에 미리 어떤 레시피로 미역국을 만들까 스터디를 했는데, 류수영 님이 편스토랑에서 보여준 양지 육수로 만든 미역국을 택했다. 백종원 아저씨의 레시피와 끝까지 고민하다가, 류수영 님이 양지로 육수를 내고 고명으로 올려서 먹으면 왠지 되게 고급스럽고 맛도 좋다고 몇 번을 강조해서 이야기한 것에 넘어갔다. 그래서 육수를 내기 위해 양지부터 파, 사과, 무 등 재료를 사고, 자른 미역과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포도를 샀다. 사실 뭐 많이 산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금방 5만 원 정도가 나오더라. 요새 장을 잘 안 봤더니.. 물가가 이렇게 올라갔나 싶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미역을 불리고 육수 재료를 얹힌 후, 물이 끓는 동안 거실도 간단히 치우고 샐러드도 준비했다. 동생도 곧 케이크를 사서 온다고 연락이 왔다. 이제 육수를 다 끓이고 미역을 참기름에 데치려고 하는데... 문이 열렸다. 띠리리리? 동생인가? 아니, 부모님이었다... 망했다.
갑자기 분위기를 주워 담을 수 없이 나는 민망해했고 어머니는 너 뭐 하고 있니? 덜덜덜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ㅋㅋㅋ 미역국을 하고 있니? 하면서 좋아하시긴 하셨는데, 나는 진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 생각이 났다. 아차... 아버지한테는 이야기해놓을 걸. 부모님이 결혼식을 다 보시지 않고 중간에 나와서 집에 오신 것이다. 이럴 수가...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게 별로 없어ㅠ
아무튼 일단 들킨 거 어떻게 되돌릴 수도 없고, 마저 미역국을 만들었다. 한 시간 끓인 육수의 맛을 봤는데, 이건 그냥 거의 진한 소고기 뭇국의 맛이었다. 이것만 먹어도 맛있다고 했던 류수영 님의 말을 이제 알 것 같았다. 미역과 섞으면 어떤 맛일까 더 궁금했다. 그와 동시에 동생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어머니가 이미 집에 도착하셨다고. 사실 어머니는 동생이 오는지 아예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작전을 조금 변경했다. 동생이 몰래 온 손님으로 문 밖에서 조카들과 함께 케이크를 들고 들어오는 것으로 서프라이즈를 하자. 그래서 이번엔 아버지께도 말씀을 드렸다. 동생이 곧 올 거라고.
나와 아버지는 동생이 문 밖에 도착해서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있는 것을 알고는, 어머니의 이목을 부엌 쪽으로 이동시켰고, 동생 내외와 조카들이 케이크를 들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들어왔을 때 어머니는 진정 당황하시면서 놀라시면서 기분 좋은 행복감에 휩싸여계셨다. 그래도 2차 서프라이즈는 성공! 이 맛에 서프라이즈 하지. 깜짝 미역국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생일 축하는 서프라이즈로 했다. 가족끼리 이렇게 한 건 정말 오랜만이다. 재미있었다.
그리고는 가족들과 모두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미역국을 먹었다. 생각보다 맛이 좋았고 어머니도 매우 좋아하셨다. 비록 이모들과 경복궁에서 미역국을 드시지는 못했지만, 아들이 집에서 끓인 양지 미역국을 드셨다. 아마도 더 맛있게 드셨겠지...?
이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까 '할 수 있을 때 자주 해드리자'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게 진짜 효도가 아닐까 싶다. 마음으로 뭔가를 해드리면 받는 사람도 진심으로 느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