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수치심으로 만드는 사람들
세상의 모든 선생님들에게
학교는 학생을 가르치는 공간인 동시에 보호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서 적지 않게 상처를 받았다.
학교가 굉장히 폭력적인 곳이라고 느낀 이유는 내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학생에게는 그에 따른 대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수치스러움이다.
나는 기초생활수급자라는 딱지를 싫어했는데 가족들의 생계와 나의 교육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그 대상으로 낙인찍히는 것은 나의 하루를 최악으로 만들었다. 어떤 선생님도 그 사실을 함부로 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가난이 나에게 수치스러울 수 있다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매일 아침, 내 가난을 두 눈으로 봐야만 했다. 8시 45분 우유 배식 명부의 내 이름 옆에는 또렷이 '수급자'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기초생활수급자이기에 우유를 무료로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작은 단어 하나에 때로는 나를 가난한 환경에 놓이게 한 부모를 원망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그것을 굳이 써놓은 학교가 이해할 수 없고 저주스러웠다.
학원을 다니고 싶었던 내가 방법을 찾아낸 건 중학교 3학년 때다. 대기업에서는 장학재단을 세워 가난하지만 꿈이 있는 학생들을 선발해 장학금을 나눠주곤 했다. 나는 그 사업에 선정되기 위해 1~2주를 pc방에서 글을 써야 했고 가난을 자백해야 했다. 그들이 나를 가엾게 여길 수 있도록 내가 얼마나 불쌍한지, 우리 집은 얼마나 가난한지, 부모님은 어느 정도로 아프신지를 나의 아픔과 고통을 전시해야만 했다.
내가 더 괴로웠던 것은 장학생으로 선발된 이후였다. 학교에서는 나를 강제적으로 전교생 앞에서 세워 표창장을 받게 했다. ‘가난하지만 꿈이 있는 학생, 학교 추천을 통해 240만 원을 받게 되다.’ 이 상황에 분노하고 불편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아무것도 해준 것 없는 학교가 학교의 위상을 위해서 마치 이 혜택을 그들이 준 것처럼 포장한 것과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모든 전교생 앞에 나의 가난을 광고한 것 때문이다. 나는 그저 인격체로 존중받고 싶었다.
그 덕분에 친구들의 미움도 적지 않게 받았다. 친구들은 내가 듣는 앞에서 선생님께 크게 화가 섞인 말을 내뱉었다.
“선생님! 인희는 장학금 받게 해 주시던데 왜 저희는 못 받아요? 차별 아니에요?”
친하던 친구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큰 상처가 되었다. 장학금 240만 원을 받는 대가가 너무 컸다.
이 외에도 가난이 수치심이 되어 돌아왔던 사건은 무수히 많다.
하루 온종일 지내야만 하는 학교.
학교는 우리가 배우는 공간일까. 자존감을 잃고 수치심을 심어주는 곳일까.
학교도 선생님도 자격이 필요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학교에서 배운 게 많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