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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코끼리 Dec 26. 2023

아이와 부모 사이의 전쟁 같은 사랑 (2)

나와 아빠와 아빠의 돈

아이와 부모 사이의 전쟁 같은 사랑 (1)

결국 그날 아빠 친구와 만나서 같이 등산을 했다. 아빠 친구 얼굴을 볼 때 마다 불륜남, 불륜남, 불륜남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서 곤란했고, 오랜만에 딸과 시간을 보내는 자리에 친구를 굳이 불러온 아빠가 불편했다. 


그리고는 등산을 마치고 아빠 집에 도착해서, 나는 얼마간 미뤄왔던 어려운 이야기를 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전세 보증금 이야기.


미국에서 한국으로 갈 준비를 할 때 전세 보증금을 찾아봤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본 나라들에서는 월세 한 달치, 많으면 월세 두 달치 정도가 일반적인 보증금이었는데 한국은 집을 빌릴 때 보증금이 꽤 높았다. 그렇지만 내 현금의 상당량은 펀드 투자에 묶여 있었고, 펀드 가격이 꽤 떨어져 있는 중이어서 회복될 때 까지 안 깨고 그냥 놔두고 싶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직장도 없는 우리한테 대출이 나오지도 않을 텐데… 미국에서 전화로 고민을 아빠한테 말하니 아빠가 시원하게 말했었다.


“아, 뭐, 니 전세 보증금 정도는 내가 빌려 줄 수 있지!”

“정말? 고마워. 그러면, 우리가 이자를 꼬박꼬박 낼게.”

“아이고 우리 사이에 이자는 무슨. 됐다.“


그리고는 한국에 왔는데, 아빠는 흔쾌히 전세보증금을 빌려 주겠다고는 했지만 어느 정도, 라고 금액을 말해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진짜 집을 찾아봐야 될 시간이 와서, 예산을 세워야 했다. 그래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빠, 전세 보증금 저번에 빌려줄 수 있다고 했잖아. 얼마 정도 괜찮겠어? 우리도 이제 집 보러 다닐 건데 예산이 있어야 되서…“

“아니 그래도 집 찾을 때까지는 시간이 좀 있을 텐데?”

“이제부터 찾아봐야지.”

“아이고 참… 니는 그 나이 되도록 돈 모아둔 것도 없나? 그냥 월세 살지?”


나는 아빠한테 받은 게 많은 사람이고, 아빠가 전세 보증금을 해 주는 걸 처음부터 거절했어도 받아들였을 거다. 하지만 한국 오기 전 전화로 전세보증금을 흔쾌히 빌려 주겠다는 말은, ‘한국에 돌아오는 걸 환영한다. 어려운 결정이었겠지만 아빠가 도와 줄게’와 같은 말로 들려, 뭔가 내가 믿을 구석이 있구나, 하고 마음이 든든했었다. 몇 달 동안 상황이 바뀌고 빌려줄 현금이 갑자기 모자라게 되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미안하다, 빌려주려고 했는데 내가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되서…” 하는 설명이 아닌 ‘니는 그 나이 되도록 돈 모아둔 것도 없나?’는 비웃는 듯한 말에, 다정함을 기대했던 순간 갑자기 뺨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아빠의 돈은 나에게 항상 좀 어려운 주제였다. 아빠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내가 태어난 후 얼마 뒤 시작한 사업으로 갑자기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 그렇지만 엄마도 아빠도, 가난을 알고 큰 사람들이라 그런지 씀씀이가 검소한 편이었는데, 그런데도 아빠가 돈을 많이 쓰는 대상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아이들의 교육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동차였다.


내가 클 때 아빠는 거의 매년 차를 바꿨다. 자동차는 점점 더 커지고 좋아지다가, 결국은 국산에서 외제차로 바뀌었다. 아빠가 차를 바꿀 때마다 하는 의식같은 게 있었는데, 새 차를 뽑은 후에는 꼭 고향에 갔다 왔다. 


아빠의 고향은 부산에서 운전해서 가기에는 꽤 먼, 강원도에 가까운 경기도인데, 그곳에는 친척들이 다 모여서 사는 집성촌이 있다. 친척들은 아직도 다 똑같이 생긴 집에 살면서 (누구 하나가 건축가라는데 같은 도면을 엄청나게 재사용 한 것 같다) 쌀농사를 많이 짓는데, 한국전쟁에서 다친 상처가 항상 아파서 아편을 했다는 소문이 있는 우리 할아버지는 성실한 농사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결국 아빠가 열두 살 때, 할아버지는 부산항 부두에서 선박용접 일을 하려고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이사했다. 


부산으로 이사해서도 사정은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집안 사정도 있고 해서, 아빠는 그 당시에 부산에 있었던 공업중학교에 입학했다가,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한 해 학업을 쉬고 전자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아빠가 고등학교에 있을 때쯤 아빠의 엄마, 나의 할머니는 위암에 걸렸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 사정에 변변히 치료를 해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그 와중에 상황이 벅찼던 할아버지는 가출을 했다고 한다. 


사정이 어려워 할머니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내가 20대 중반이었을때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들었다. 아빠는 그때 지역에서 20년 넘게 성공적으로 사업을 해 온 중소기업 사장이었던 터라, 할아버지 장례식장은 화환과 조문객들로 넘쳐났다. 화환을 둘 데가 없어서, 남의 장례식장 앞까지 화환이 넘쳐나서 민망할 정도로. 


그 때 조문을 온 할머니의 자매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이야기했다. 우리 언니 때랑은 너무 다르다고. 제대로 장례를 할 사정이 되지 않아, 돌아가신 할머니의 몸을 멍석에 말아 지게에 지고 산을 올라가서 묻었단다.


아빠가 새 차를 살 때마다 고향에 갔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할머니 산소에 잘 살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던 걸까,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던 친척들에게 나날이 강해지는 경제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걸까. 둘 다였을까.


어쨌든 은연중에 아빠에게 받았던 메시지는, 아빠가 경제력을 권력으로 느낀다는 것이었다. 새로 생긴 돈이, 취약했던 시절의 기억을 덮어버릴 수 있다고 믿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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