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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May 02. 2024

행복 기준점

친구가 말했다. 

“하림아, 주변에서 네가 제일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     


31살 봄, 우리는 함께 덕수궁 담벼락을 걷고 있었다.

나는 10평짜리 빌라 반지하에서 신혼 생활을 막 시작한 참이었고 친구는 UN 소속으로 전 세계를 누비던 중이었다.

하지만 친구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삶이 행복하다고 느꼈으니까.     


그 후로도 친구와 지인들에게 종종 같은 말을 들어왔다.

너는 참 행복해 보여. 너 팔자가 제일 좋구나.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지인들은 나보다 돈이 많거나, 학력이 높거나, 외모나 능력이 뛰어나다.

나로서는 ‘남과 비교했을 때’ 내세울 게 하나도 없다

최고의 남편이 있긴 하지만 나 자신만 놓고 봤을 때 말이다.

왜 그들은 내게서 행복의 냄새를 맡을까?

내 행복 기준점이 낮기 때문일 거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났고 20대 막판까지 힘든 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서른 살 이후의 삶은 솜사탕처럼 부드럽기만 하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뭐야? 그때에 비하면 할 만한데’ 하는 생각이 든다.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은 깜깜한 지하에서 온 가족이 함께 살아간 적도 있는데 뭘. 

지하실에 빗물이 들이차서 살림살이가 몽땅 물에 젖은 적도 있는데 뭘.

엄마가 큰 사건에 대한 충격으로 미음 한 모금도 드시지 못하고, 아빠가 고목처럼 말라가서 이러다 돌아가시려나 괴로워하며 잠 못 이룬 날도 많은데 뭘.

가혹하긴 했지만 용기를 끌어 모으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들이었다.     


행복은 자족하는 마음이다. 

별일 없는 하루가 행복한 하루라는 걸 별일 있는 하루를 수없이 겪고서야 알게 된다.

행복 기준이 내 삶의 밑바닥이었던 지점에 있기에 그보다 눈금이 살짝만 올라가도 행복한 마음이 든다.

어떤 경우건 기준점을 남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맞추는 순간 대부분의 경우 삶은 가능성과 희망으로 바뀐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을 겪어봤지만 아직까지 육체가 큰 병으로 고통 받은 적은 없다.

중병을 얻게 된다면 내 행복 기준점은 더 낮아지겠지.

아침에 눈 뜨고 숨 쉬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끼겠지.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당신과 나는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지고 있다.

아직 살아있고, 남은 시간이 있다. 

누군가 행복하면 곁에 있는 이에게도 행복이 살짝 스며든다.

하지만 그의 행복을 온전히 가져올 수는 없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스스로 행복하면 된다.

행복처럼 얻기 쉬운 게 또 어디 있나.

마음의 방향만 정하면 되는 걸.          


삶은 그저 놀이거든진지할 것은 조금도 없거든그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나아가는 것 자체가 네 아름다움의 증거라고그렇게 너와 내가 또 한 시절을 건너왔다고.

<새벽과 음악> 이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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