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차타고 지금 당장 떠나기

by 유자와 모과

남편의 후배 이야기다. 그녀는 어느 토요일 아침 친구와 통화를 하며 날씨가 참 좋다고, 놀러가기 좋은 날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가 그럼 놀러나 갈까 했고 둘은 즉흥적으로 제주도를 가기로 결정했다. 후배와 친구는 바로 짐을 싼 후 지하철 안에서 제주도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고 차량 렌트와 숙박 시설을 예약했다. 그들은 토요일 오후에 제주도에 도착해 신나게 여행을 즐긴 후 일요일 저녁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용기가 대단한데. 난 저런 여행은 절대 할 수 없을텐데..’


나는 예고 없는 방문이나 느닷없이 잡히는 약속을 매우 꺼려한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최소 일주일 전에는 알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고 적절한 대비를 할 수 있다. 직장인도 아닌데 스케줄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체력 때문이다. 과로를 하거나 몸이 피곤할 정도로 무언가에 집중하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쳐 아무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만약 수요일에 약속이 있다면 화요일에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만약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여행을 가기로 했다면 월요일부터는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한다. 평소 몸에 쌓이는 피로 지수를 예민하게 인식하는 편이다. 건강에 빨간 불이 들어올 신호가 보이거나 과로한 것 같은 기분이 들면 모든 걸 멈추고 휴식을 취한다. 기본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40살이 될 때까지 독감 한 번 걸리지 않은 건 세심한 관리 덕분이라 생각한다. 며칠 전에도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넌 참 냉정하게 거절도 잘해. 나도 너처럼 거절할 땐 해야 되는데.’

이런 상황이니 어느 날 아침 남편이 오늘 여행이나 갈까? 한다면 내 대답은 99.9% 확률로 ‘아니요’ 가 될 것이다. 깜짝 파티도 싫고 깜짝 선물도 싫어하는데 하물며 깜짝 여행이라니...하지만 내게도 로망이 있다.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져서 동해에 갔다 왔어’라는 지인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만약 내게도 차가 있다면 즉흥적으로 바다를 보러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날 몸의 피로도가 50% 이하여야 하고, 최대한 집에서 가까운 곳이어야 하지만. 그리고 지금 내게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붕붕이가 있다. 집에서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까지 거리는 215km. 휴게소를 한 번 들린다고 하면 3시간 후 나는 모래사장을 뛰어다닐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3시간을 운전하여 바다에 도착한 후 3시간 바다를 보고 다시 3시간을 운전해 집에 온다면 나는 바다를 구경하러 간 걸까 고속도로 구경을 간 걸까. 운전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편 친구이자 내 친구인 철수(가명)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도로를 차로 달리는 걸 좋아한다. 10년 전부터 우리는 일 년에 한두 번 철수와 국내 여행을 간다. 세종에 사는 철수는 나와 남편을 태우러(괜찮다고 사양해도) 굳이 의왕까지 올라온 후 우리를 태우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간다. 24시간 운전만 하라고 해도 즐겁게 운전대를 잡을 친구다. 남편과 여행을 떠난다면 일주일도 부족할 코스를 철수와 함께라면 당일치기도 가능하다.


심지어 철수는 음식에도 관심이 없다. 그에게 끼니란 허기를 채우기 위한 저작 활동일 뿐이며 잘 먹지도 않는다. 휴게소에서 커피나 간식 좀 먹고 가자고 아무리 사정해도 세워주지 않는다. 나는 갇힌 공간을 싫어하기에 승용차에 오래 앉아 있으면 뛰쳐나가고 싶다. 초창기에 몇 번 철수와 여행을 다닌 후 다시는 철수 차를 타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며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맞춰간다. 이제 철수는 2시간에 한 번씩 휴게소에 들르는 친절을 베풀고 나는 흥미진진한 추리 소설을 읽으며 아직도 차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으려 노력한다. 차타는 것도 좋아하고 걷는 것도 좋아하는 남편만이 평온한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볼 뿐.


출근 준비를 하는 남편에게 우리도 한번쯤은 즉흥적으로 바다를 보러 가야 되지 않겠냐고 물었다. 남편은 언제든 가자고 하면 따라 가겠다고 대답한다. 나는 다음 주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약속이 있으니 화, 수, 금 중 하루를 정해 바다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남편은 휴가야 내면 되지만 그렇게 가는 건 즉흥적으로 떠나는 여행 취지에 어긋나지 않냐고 되묻는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화, 수, 금 중 어느 요일에 떠날지는 혼자만 생각하고 그 중 하루를 골라 아침이 되면 내게 바다를 보러 가자고 제안하라고 말해주었다. 남편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 후 집을 나선다. 조만간 즉흥적으로 떠날지도 모를 여행을 위해 오늘부터 컨디션 조절을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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