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여행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까지 23개 나라(46개 도시, 중복 방문 제외)를 방문하였고, 돈이 있건 없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티끌만한 기회만 있어도 절대 놓치지 않았다. 다행히 남편도 여행을 좋아한다(남편을 처음 만난 장소는 하노이 국제공항이다). 매년 우리의 계획은 어디로 여행을 갈 것인가 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다 2020년 봄부터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어라 이건 뭐지?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봄과 여름을 보냈고 가을쯤 되서야 올해는 해외를 나갈 수 없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그리고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던 11월 내게 붕붕이가 생겼다. 이것은 신이 주시는 위로의 선물인가? 비행기를 탈 수 없는 답답함을 자동차로라도 해소하라는 뜻인가?
그래서 시선을 한국으로 돌려 국내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국내 여행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차를 몰고 다녀보니 의외로 한 번도 방문하지 못한 도시들이 많았다. 우리 부부는 국내 여행을 갈 때는 항상 그 지역의 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관광 안내 책자를 신청한다. 지역별 관광지도는 휴게소에도 구비되어 있기에 휴게소에 들릴 때마다 한 번씩 살펴본다. 지도를 펼치면 도시 전체가 한 눈에 보이고 어디를 방문하면 좋을지 감이 온다. 지도를 신청하면 지역 특산물과 맛집 정보 혹은 관광명소가 담긴 책자를 보내주는데 놀랍게도 관광할 장소가 전혀 없는 도시도 있다. 내가 사는 의왕만 해도 관광지도에는 여러 명소가 소개되어 있지만 냉정히 말하면 왕송호수, 백운호수, 청계산 맑은 숲공원 외에는 추천할 만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는다.
예전에는 관광지도를 펼치면 버스가 다니는지, 도보로 갈 수 있는지를 따져 여행 코스를 계획했다. 걷기에 좋은 길이 관광 1순위였다면 이제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가 있는지를 함께 살피게 된다. 얼마 전 순천 여행을 다녀왔는데 낙안읍성에서 상사호까지 펼쳐진 드라이브 코스가 너무 근사하여 달리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차가 없었다면 결코 가볼 수 없는 길이었다. 차로 여행을 하다보면 계획한 대로 물 흐르듯 정확히 흘러가기에 몸과 마음이 편하긴 하다. 하지만 동시에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도 적어진다. 기차와 버스와 두 발로 여행을 하다보면 곳곳에 암초들이 숨겨져 있어 추억할 만할 일들도 많아진다.
2015년 여름 강화도 여행을 떠났을 때 우리는 해든 뮤지움을 가기로 했다. 미술관까지 가는 버스가 없었기에 2시간동안 시골길을 걸어갔다. 땡볕을 맞아 벌게진 얼굴로 미술관에 도착하니 관장님께서 대체 어떻게 여길 걸어왔냐며 추파춥스 두 개를 건네주었다. 야외 데크에 앉아 선크림을 온 몸에 덧바르며 시원한 커피를 마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2016년 변산 반도 여행을 떠났을 때는 모항에서 하루에 딱 4번 지나가는 버스를 눈앞에서 놓쳐 3시간 가까이 버스를 기다린 적도 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 죽을 뻔했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둘이 앉아 하염없이 도로를 바라보던 풍경은 잊을 수 없다.
선운사로 향하는 덜컹거리던 시골 버스 안에서 산 너머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던 때도 생각난다. 승객이라고는 남편과 둘 뿐이라 제대로 탄 게 맞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기사가 우리를 납치하면 어쩌지 하는 엉뚱한 마음도 들었다. 우리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낡은 버스는 차 한 대 없는 시골길을 맹렬한 속도로 달려 나갔고, 엉덩이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들썩들썩 춤을 추었다.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두 손을 꼭 맞잡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터미널 앞 식당들, 버스 정류장 옆 자판기, 낡은 구멍가게 간판, 전봇대에 붙은 낡은 광고지. 장기를 두는 어르신, 걸어서 여행을 하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할 때의 기억이 함께 떠오른다. 시간이 흘러 어렴풋해지더라도 그날이 연속성을 지닌 채 통째로 저장된다. 하지만 차로 여행을 하고부터는 장소 위주로 단편적인 기억이 모아진다.
차를 타면 걷거나 자전거를 탈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속도가 빨라져 사소한 구경을 놓치기도 한다. 와 저 건물 좀 봐! 차를 운전하다 남편에게 소리치지만 뒤 따라 오는 차가 있기에 즉시 멈춰 구경하지 못한다. 저 나무 멋진데 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나쳐 버리기도 한다. 자동차가 애물단지가 될 때도 있다. 작년 겨울 거제도 여행을 갔을 때 아침을 먹으러 주택가에 있던 작은 빵집을 찾았다. 빵이 맛있기로 소문 난 집이었다. 주차장이 보이지 않아 주인에게 문의하니 주차장은 따로 없어 골목 적당한 곳에 세워야 한다고 하셨다. 주변을 뱅뱅 돌았으나 결국 세울 장소가 없어 주차장이 잘 갖춰진 다른 카페로 이동해야 했다. 걸어 다닐 때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차로 여행을 하면 걸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도시를 돌아다니게 된다. 반 년 만에 스무 군데가 넘는 도시를 여행했다. 하지만 여행의 밀도는 걸을 때의 풍성함에 미치지 못한다. 자동차의 편리함을 맛보았으니 앞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 국내를 여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자동차로 이동하고 여행지에서는 최대한 걸어 다니기, 한 곳에 충분히 머무르기. 걷기를 즐기는 여행자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