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카푸어되기

by 유자와 모과

곱게 단장을 마친 한 여성이 바닥에 앉아 라면을 먹고 있다. 휴대용 버너 위에 양은 냄비를 올리고 라면을 끓인 후 냄비 뚜껑에 면발을 받쳐 먹고 있는 걸 보면 그녀의 자취방인 듯하다. 편한 자세로 앉아 라면을 먹는 폼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그녀는 라면 면발을 후루룩 삼키며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아차, 방 한 구석에 명품백 하나가 놓여 있다. 가방 안에 있던 텀블러가 기울어져 흘러내린 커피가 가방을 적시고 있는 중인데 주인공은 아직까지 눈치를 채지 못한 상태다.


한국화가 김현정의 내숭 시리즈 중 첫 작품인 <아차 我差>를 말로 풀어보았다. 인스턴트 라면과 명품백이 극명하게 대비되며 관객에게 씁쓸한 웃음을 자아낸다. 작가는 말한다. ‘명품이라는 것은 그 경제적 가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디자인이나 내구성 등 그 기능보다도 타인의 시선이 주는 가치가 고도로 반영되는 되는 특성을 가진다. 이를테면 명품은 자아가 타인의 시선을 ‘만족시키는’데 특화된 물건인 것이다.’ 비록 현실은 살림살이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방에서 컵라면을 먹어야 하는 처지지만 괜찮다. 내겐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명품 핸드백이 있기 때문에. 명품백을 들었으니 나를 무시하지 않겠지.


나도 20대 때 그림 속 여성처럼 행동했던 적이 있다. 좁디좁은 원룸에 살면서 월세 반년치보다 비싼 가방을 들고 다녔다. 종자돈을 모아 집을 옮기는 게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높일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경제에 대한 개념이 없으니 미래를 계획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그때 땀 흘려 번 돈을 몇 개의 명품 가방을 사는데 쏟아봤기에 그 행위가 얼마나 허무한지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비싼 가방과 깨달음을 맞바꿨다고나 할까?


운전을 하다보면 도로에 BMW, 벤츠, 아우디가 너무 흔해 여기가 독일인지 착각할 정도이다. ‘나만 빼고 다 부자네’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카푸어(car poor)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적 의미는 ‘본인의 경제력에 비해 무리하게 비싼 차를 샀다가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매달 월급의 상당 부분이 자동차로 들어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고급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자동차라는 기계에 깊은 관심과 애정이 있어 그럴 수도 있지만 그림 속 주인공처럼 자신의 시선보다는 타인의 시선이 더 중요하기에 카푸어의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외제차가 있으니 나를 대우해 주겠지’라는 생각 때문에.


대부분의 수입차는 국산차보다 훨씬 비싸지만 보증기간인 3~5년이 지나면 가격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검색 창에 수입 중고차를 입력하면 천만원대 매물이 수두룩하다. 가격이 연식이나 킬로수에 비해 터무니없이 저렴한 건 허위 매물일 가능성이 높다. 수입 중고차는 부품 교체비(세상에서 가장 비싼 차 중 하나인 부가티의 엔진오일 교체비는 2천 5백만원이라 한다)나 수리비가 국산차에 비해 최소 2~3배 비싸고 수리 기간도 길다. 주변을 둘러보라. 기아 오토큐나 블루핸즈 정비소는 곳곳에 널려있다. 만약 내 붕붕이에 문제가 생긴다면 당장 근처에 있는 정비소로 달려가 정비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내 차가 수입차라면 정비소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을 뿐더러 바로 수리를 받을 수 있을지도 기약이 없다. 부품을 해외에서 공수해야 되면 수리 기간 동안은 차 없이 생활하거나 렌트를 해야 한다.


예전에는 사회 초년생이라면 생애 첫 차로 경차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젊은 세대에게 점점 외면 받고 있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소형 SUV, 준중형 세단, 수입차를 첫 차로 구입하는 20~30대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돈이 넉넉하여 고급 차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남의 시선을 의식해 무리하게 차를 사려 한다면 잠시 멈춰 생각해 보면 좋겠다. 차는 마이너스 재산이다. 주식은 오를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자동차는 사는 순간부터 끝없는 추락뿐이다. 나는 차를 운전하기 전까지는 유류비나 할부금 외에는 자동차에 돈이 들어갈 일이 없는 줄 알았다. 매년 보험료와 세금을 그렇게 많이 내야하는 줄도 몰랐고, 자동차의 온갖 부품을 킬로수에 따라 교체해 줘야 하는 줄도 몰랐다.

고급차는 배기량이 커서 매년 세금도 많이 떼인다. 2000cc만 되도 일 년에 52만원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 2500cc는 65만원이나 든다. 운전경력이 짧은 20대는 보험비도 월등히 높다. 멋진 엠블럼이 박힌 운전대를 처음 잡을 때는 가슴이 뛰고 흥분 될지 모르겠지만 매달 청구되는 할부금은 현실을 강타할 것이다. 담대한 기상으로 차를 구매했지만 매달 청구되는 요금에 원 펀치, 투 펀치, 쓰리 펀치를 맞고 쓰러지는 젊은이들이 많다. 사회 초년생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특히 젊은 남성들이 차를 사려는 이유는 뭘까? 직장이나 공식적인 모임에서 여자는 화장을 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처럼 남자라면 차가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장 안한 여자가 눈길을 끌 듯 차 없는 남자도 눈길을 끈다. 타인의 평가나 체면 차리는 데 신경 쓰지 않고 분수에 맞게 살면 삶이 놀랄 만큼 가벼워진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면 사는 게 쉬워진다.


정말 부유한 사람은 굳이 부유한 척을 하지 않는다. 내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몇 분 있다. 그 중 한분은 나와 오랫동안 우정을 쌓아가고 있다. 그 언니와 처음 만난 건 대학원에서였다. 함께 공부를 하면서 친해졌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청담동 사모님이셨다. 언니가 전혀 티를 내지 않아 오랫동안 부자인줄도 몰랐다. 남에게 무언가를 애써 드러내며 특정 부분을 어필하려는 사람은 어쩌면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더 보여주려 하는 건지도 모른다.


‘소형차를 타면 남들이 나를 무시할까?’ 무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계획한 삶의 목표가 있고 그걸 이루기 위해 돈을 모으고 싶다면 무시하는 시선도 묵묵히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현재의 삶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위한 대비는 더욱 중요하다. 인간의 수명은 생각보다 길고 우리 육체는 나이가 들수록 필연적으로 쇠약해진다. 젊을 때는 돈이 없어도 튼튼한 육체가 있지만 노인이 되었을 때 돈이 없으면 사는 게 비참해진다. 한번 엉킨 실은 다시 풀기 어렵다. 자동차 할부금과 유지비에 허덕대다 대부업체를 한번이라도 이용하는 순간 신용도는 하락한다. 숨만 쉬어도 매달 백만 원이 나가는 고급 자동차가 내 삶에서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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