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경차가 아름답다.

by 유자와 모과

언젠가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다가 자정쯤 집에 도착한 적이 있다. 아파트 지하 1층과 2층을 빙빙 돌았지만 도무지 차를 댈 공간이 없었다. 남들은 이중 주차도 잘만 하는데 나는 귀여운 붕붕이가 이리 저리 밀쳐지는 걸 상상만 해도 싫다. 할 수 없이 코너 벽 쪽에 차를 세우고 들어왔는데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침에 누군가 운전대를 꺾다 혹시라도 붕붕이를 긁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자꾸 들었다. 통로가 넓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밤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리 집은 도둑이 들어도 훔쳐갈 게 하나도 없다. 금도 없고 은도 없고 현금도 없고 비싼 가전제품도 없다. 가구도 거의 없어 방들과 거실이 텅 비어 있다. 이건 비밀인데 우리 집에도 눈독 들일만한 게 있긴 하다. 그건 바로 벽지와 커튼. 4년 전 남편과 공동 명의로 된 첫 집을 매입했을 때 집의 바탕이 될 소품과 가구는 가격보다는 품질을 따져 구매했다. 벽지는 화학 물질이 전혀 들어있지 않고 황토 흙이 섞인 천연벽지를 발랐기에 벽지 값과 시공비가 일반 벽지에 비해 몇 배 비쌌다. 커튼 역시 천연 모직과 천연 린넨 재질을 선택했기에 평범한 커튼보다 훨씬 비쌌다. 침대와 탁자 역시 호두나무 원목으로 제작한 걸 선택했기에 참으로 비쌌다. 하지만 어느 도둑이 벽지를 뜯거나 무거운 침대를 들고 가려 할까?


가져갈만한 물건이 전혀 없으니 일주일 혹은 이주일 집을 비우고 여행을 떠나도 마음이 편했다. 그러다 작년에 아빠가 최신 노트북을 선물로 주셨고, 남편도 회사에서 최신 태블릿을 받아 왔다. 갑자기 집에 비싼 전자제품이 두 대나 생기자 오랜 기간 집을 비우는 게 찜찜해졌다. 제품 가격을 따져보니 둘이 합쳐 300만원. 도둑이 가볍게 한손에 들고 가버리면 끝이다. 이제는 며칠 씩 집을 비울 때면 보조키로 문을 한 번 더 잠그고 여행을 떠난다. 언젠가 좀 더 부자가 된다면 금고를 설치할지도 모른다.


몇 백만 원짜리 전자제품을 갖고 있어도 마음이 이토록 무거워지는데 하물며 수천만 원짜리 자동차는 말해 무엇 하랴. 리안 모리아티의 소설 <아홉 명의 완벽한 타인들>에서 람보르기니를 타고 시골길에 잘못 들어선 주인공의 모습을 살펴보자. ‘벤은 노란 스포츠카 옆에 웅크리고 앉아 돌에 맞아 페인트가 벗겨진 곳은 없는지 살폈다. …… 다행히 긁힌 곳은 없었다. 정말 기적이었다. 하지만 자동차 바닥에 어떤 충격이 가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바닥 손상을 확인하려면 작업장에 가서 자동차를 들어 올려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주인공처럼 수퍼카까지는 아니더라도 만약 내가 1억짜리 차를 끌고 다닌다면 식당에 밥 먹으러 가서도 맘 편히 앉아 있지 못할 거다. 넓은 주차장 외에는 주차도 안할 거고 노면 상태가 나쁘거나 좁은 길은 지나가지도 않을 거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도 밖에 나가지 않을 거다. 이쯤 되면 차가 아니라 짐이다. 그래서 저렴한 경차가 내겐 최고의 차로 느껴진다.

작은 차는 주차장에서도 환영받는다. 차를 주차할 때 내 차가 작으니 옆 차와의 간격이 넉넉해진다. 주차하려는 장소 옆에 작은 차가 서 있다면 나 역시 내리기 편해 기분이 좋아진다. 반면 거대한 차 옆에 차를 댈 때는 아무리 내 차가 작아도 조심히 주차한 후 문콕을 하지 않도록 살며시 문을 열고 내려야 한다. 주차 폭이 좁은 주차장에서 덩치 큰 차가 덩치 큰 차 옆에 주차하려다 결국 포기하고 다른 자리를 찾는 경우도 보았다.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경차 자리는 입구 바로 옆에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경차가 VIP급 환대를 받는 경우는 주차장이 유일할 것이다). 주차 공간 폭을 줄여도 경차는 몸체가 작아 많은 차를 세울 수 있기에 업체 입장에서도 효율적이다.

물론 단점도 있다. 경차는 도로에서 종종 무시당하고 모든 차가 붕붕이를 추월한다. 얼마 전 평창에 사는 단짝 친구가 전화를 했다. 친구는 오래 전부터 레이를 타고 있었기에 동지의식이 느껴진다.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차는 잘 타고 다니냐고 했더니 친구가 이번에 차를 바꿨다고 했다. “뭐? 레이를 버리고? 왜? 레이가 사고라도 쳤니? 혹시 너 복권에 당첨 되기라도 한 거야?” 친구는 복권에 당첨되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돈을 모아 투싼 하이브리드로 바꿨다고 했다. 친구는 새 차를 받는 전날까지도 레이면 충분한데 괜히 바꿨나 후회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SUV를 처음 타고 운전 하는 순간 친구 머릿속에서 레이는 깨끗이 지워졌다. “있지. 차를 딱 탔는데 너무 부드럽고 너무 잘 나가는 거야. 언덕에서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아무도 내 차를 추월하지 않더라.” 나는 또 한명의 동지를 잃었다.


경차가 이래저래 힘이 달리기는 한다. 급하게 운전대를 돌리면 뒤집어 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과속하며 달리던 레이가 톨게이트 앞에서 확 끼어들더니 옆으로 폭 쓰러지더라는 지인의 목격담도 있다. 레이는 바퀴는 작은데 천장이 높아 무게중심이 올라가 있기에 코너링을 과격하게 하거나 한쪽 바퀴가 보도블록 위로 잘못 올라가면 옆으로 무게가 기울어지면서 자빠질 수 있다. 2012년 국토부에서는 국내에서 판매되는 승용차 가운데 급회전시 뒤집힐 가능성이 가장 높은 차로 레이를 지목하기도 했다. 기아자동차는 그 후 차체 자세 제어 관련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하여 새 모델을 내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이가 절대 넘어지지 않을 거라는 말은 아니다. 보조바퀴라도 달아야 하나.


레이는 작은 몸집에 비해 연비가 좋은 편도 아니다. 요즘 차들은 웬만하면 붕붕이보다 연비가 좋다. 경차는 다른 차들이 차선에 잘 끼워주지도 않고 2차선으로 가고 있는데도 빨리 가라고 재촉하기도 한다. 고속도로에서 성질 나쁜 트럭 운전사가 뒤에 바짝 붙어 경적을 뿌우 울리면 심장이 쿵쾅거린다. 무거운 짐을 실은 트럭은 속도를 떨어뜨리면 다시 가속하기 쉽지 않기에 가능한 속도를 낮추지 않고 달리려 한다. 대형 트럭이 저 멀리서부터 차간거리를 좁히며 맹렬하게 달려오면 얼른 속도를 내어 앞으로 달려가거나 차선을 비켜줘야 한다.


직접 운전이란 걸 하기 전까지는 랜드로버처럼 투박한 모양의 큰 차를 좋아했다. 영국 코번트리에 있는 로버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자동차 회사로 외형 가공에 드는 금형비를 줄이기 위해 차체 패널이 평탄하고 모서리가 각진 디자인을 채택했다. 튼튼하고 군대 차 느낌의 랜드로버를 몰고 싶은 로망이 있었지만 운전을 해보니 한국에서는 광활한 도로를 찾기가 어렵다. 랜드로버는 좁은 골목이 많은 한국보다는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미국 도로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한국 지형에서는 아무리 좁은 골목길이라도 멸치처럼 요리조리 헤치며 나아갈 수 있는 경차가 어울린다. 말은 이렇게 한다만 나도 언젠가 차를 바꾸게 되면 레이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새 자동차를 찬양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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