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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Jan 06. 2020

전통의 미래

딸아, 내가 죽으면 양지바른 곳에 묻어다오.

 일 년에 두 번, 팔촌 만나는 날


 매년 청명과 추석 전 주가 되면 우리 가족은 청주에 있는 선산에 가서 성묘를 한다. 막걸리 한 병과 말린 북어만 들고 가는 게 아니라, 보수 작업이나 벌초를 위한 도구도 가지고 간다. 그 날이 되면 전국에 있는 친척들도 삼삼오오 모여든다. 오전에 함께 제초 작업을 하고, 해가 중천에 뜨면 삽을 내려놓고 술도 한 잔 하는 그런 자리다.


 조부 대(代)가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제 아버지 대가 집안의 어른이시다. 조부 대의 할아버지들은 사촌지간이셨다. 아버지 대에서는 육촌, 내 대에서는 팔촌이다. 그리고 아직 몇 명 없긴 하지만 우리 자녀 대에서는 서로가 십촌이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한다고 해도 법적으로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먼 친척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전히 많은 친척들이 해마다 모이긴 하지만, 그 수는 점차 줄고 있다. 하는 일이 바빠서, 외국에 나가서, 얼마 전에 이혼을 해서 등등 이유도 다양하다. 어렸을 때 이런 자리에서 가끔 보던 팔촌 여동생들은 대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내가 중학교 들어갈 때 초등학생이 되었던 미선이는 올해 서른둘이 되었을 것이다. 당숙 아저씨 얘기를 들어보니 재작년에 시집가서 애 엄마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서로 못 알아본 채 지나갈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평생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보수 작업이 끝나고 갖는 술자리가 결코 편하지는 않다. 언젠가부터 아버지 대 형제들 간에 좋은 얘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는 돈 문제다. 선산을 모시는 데에는 돈이 들어간다. 아버지를 포함한 육촌 형제 분들이 각자 정해진 회비를 걷어 운영하고 계신데, 미납하시는 분들이 많다 보니 분위기가 그리 좋지만은 않다. 저조한 출석률도 이슈 중 하나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로는 각종 핑계로 나타나지 않는 분들이 많아졌는데, 작년 봄에는 아저씨 한 분이 술 한 잔 하시고 서운하다며 말을 꺼내셨다. 안 그래도 우리 집에서 나와 아버지 둘 만 온 걸 보시고, “태원아, 엄마는 오늘 안 오셨니? 도원이(동생)는 왜 안 왔니?”라고 불만 섞인 말투로 물으셨던 터였다.


 “형님들, 저희는 촌수 상 육촌이지만, 저는 육촌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동네에서 자란 사촌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우리 아버지들이 물려주신 유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1년에 고작 두 번 모이는 것도 이 핑계, 저 핑계로 안 오면 되겠습니까?”


 말은 ‘형님들’이라고 했지만, 사실 우리 아버지를 지칭하여 말씀하신 거였다. 나의 할아버지는 장손이셨지만 독자이셨기 때문에 나의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에게는 사촌이 없다. 반면, 작은할아버지 댁은 형제가 많아 자식들도, 손자들의 수도 많다. 하필 그 해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우리 집에서는 나와 아버지만 왔었는데, 이는 곧 “장손 집에서 이렇게 안 오면 되겠느냐?”라는 저격이었다.


 안 그래도 적은 쪽수에 자격지심이 있으셨던 아버지는 이래 저래 당신 동생과 아들, 조카들을 열심히 변호하셨지만, 이미 ‘장손 댁에서 모범을 보여야지 그러면 안된다’는 스탠스를 굳힌 아저씨를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끼어들 위치가 아닌지라 가만히 듣고 있는데 짜증이 났다. 꼬투리 잡아 투정 부리는 아저씨가 미워서가 아니었다. 시대의 변화를 억지로 부여잡고 있는 어른들의 모습이 답답해서였다.




 아버지 대에서 가장 막내인 병태 아저씨는 나와 띠 동갑으로 올해 막 쉰이 되셨다. 비교적 늦은 결혼을 하신 아저씨는 성묘 때면 외동딸 ‘예원이’를 꼭 데리고 오신다. 올해 갓 아홉 살이 되어 나와는 딸 뻘 되는 나이 차이지만 엄연히 같은 항렬자를 쓰는 귀여운 팔촌 ‘동생’이다. 하지만 예원이도 2-3년 후부터는 만나기 어려울지 모른다. 친구들과 놀기에도 바쁜 주말, 산 골짜기에 웅크리고 앉아 늙은 아저씨들과 먼 친척 오빠들 일하는 거 보는 게 꼬마 아가씨에게 뭐 그리 즐거운 일일까.


 생각해보면 예원이 뿐이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미선이와 예원이 사이에 이제는 얼굴과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많은 여동생들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타나지 않았던 그 아이들. “언젠가 너희들도 여기에 묻힐 거니까.”라는 말에 억지로라도 끌려 나왔던 남자 형제들과 달리 그들에게는 꼭 가야 한다는 명분도, 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딸아, 내가 죽으면 양지바른 곳에 묻어다오.


 작년에 나는 딸을 얻었다. 결혼 후 3년 간 아이가 생기지 않아 나름 몸 고생, 마음고생을 한 후 얻은 귀한 딸이다. 어른들은 장손인 내가 아들 하나 더 낳길 은근히 바라시는 눈치다. 하지만 그동안 겪은 고생을 잘 아시기도 하고, 우리 부부의 나이가 이미 30대 후반이기 때문에 대놓고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나 역시 할 수만 있다면 하나보다 둘이 좋다고 생각은 하지만, 쉽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다.


 아들이 없는 내가 조선 시대 양반이었다면, 첩이나 씨받이를 받아서라도 대를 이었을 것이다. 첩을 둘만한 형편이 못되었다면 동생네 아들을 양자로 들여서라도 대를 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도 분명 불임이 있었을 것이고, 내리 딸만 낳는 가정들이 있었을 텐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대를 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저런 방법이 가당키나 한가. 첩과 씨받이는 말할 것도 없고, 양자를 들이는 것도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일이다.




 간단한 계산을 해보자. 정말 이상적으로 생각하여, 모든 젊은이가 결혼하여 둘씩 자녀를 낳는다고 해도, 넷 중 한 가정에는 아들이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4세대를 채 넘기지 못한 채 아들 대가 끊길 것이다. 더군다나 현재의 비혼, 딩크, 저출산 트렌드를 감안할 때, 그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아들에 의존하여 조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선산을 관리하는 일은 유지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올봄에는 병태 아저씨께 여쭈려 한다. 혹시 돌아가시면 이 선산에 묻히시겠냐고. 예원이에게 1년에 두 번 찾아와 풀도 뽑고, 무너진 봉분도 세우고, 잔도 올려달라고 하시겠냐고. 물론 “그러겠다. 아비 산소 오는 게 자식 된 입장에서 뭐 그리 힘든 일이겠니.” 하실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씀드리려 한다. 


저는 여기 묻히지 않을래요. ‘딸아, 아빠가 보고 싶을 때 부담 없이 올 수 있도록 너 가까운 납골당에 쉴 수 있게 해 다오.’라고 말하려고요.



 선산을 두고, 조상 제사를 장손이 지내는 건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시절의 흔적이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친척들끼리 가까이 살며 촌락을 이뤄 같이 농사를 짓고, 정말 육촌과 팔촌들도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던 시절의 유산이다. 제사가 있는 날이면 그들은 일을 마치고 하나둘씩 종가에 모여 조상께 예를 드렸을 것이고, 명절이면 다 같이 산에 올라가 조상들의 봉분을 손 보았을 것이다. 즉, 그들에게 조상을 모시는 의식은 생활과 유리되지 않은 삶의 일부였던 것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농업 공동체에 기반한 집성촌은 사라진 지 오래고, 부모 형제지간이라도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작은 아버지는 퇴근 후 부리나케 150km를 달려 아버지 댁으로 오신다. 청명과 추석 때 전국 각지에 사는 방계 가족들이 새벽부터 출발해 선산에 모였다가 세 시간 얼굴 보고 각자 흩어진다. 이렇게 옛날 방식으로 조상을 모시는 것은 더 이상 삶의 일부가 아니다. 미리 시간을 맞추고, 어느 정도 ‘룰’을 만들어야 겨우 돌아갈 만큼 생활에서 유리되어 있다. 오늘날의 생활양식에 과거의 방식을 그대로 끼워 넣은 탓이다. 새로운 세대들은 더 이상 과거의 유산을 그대로 따라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각자 살고 있는 공간의 물리적인 거리만큼이나 멀어진 생활환경의 차이 때문에 친척들 간의 유대감은 약해진 지 오래다. 


 가끔 아버지께서 회상하며 말씀하신다. 


 “국민학교 때 댓재 할아버지 댁 제사가 있으면 아버지(나의 할아버지) 모시고 같이 갔었지. 추운 겨울에 불빛도 없이 산길을 가는데 어찌나 바람은 센지. 그러다 개울물에 발이라도 빠지면 동상 걸릴까 봐 아버지가 날 업고 가셨어.”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요즘 제사 지내러 오는 건 일도 아니다.’라는 뜻에서 말씀하셨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아버지, 말씀하신 60년대에도 이미 사회가 변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도 이미 고생스럽게 친척집에 방문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살기 시작했는데, 허덕이며 옛날 방식을 고수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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