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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안녕 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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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07. 2019

관계의 끝

진공 상태 1부



안녕 메타. 나른한 가을이 걷히고, 거리엔 벌써 찬 공기가 그득해. 내 기울어진 옷장에는 아직도 앙고라 니트니 가디건이니 하는 옷들이 가득한데 창문 너머의 사람들은 온통 겨울을 살고 있네.


겨울이야. 너를 잃어가고 있는 겨울. 얼어붙은 날들을 책임지라며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질 내 모습을 예상했다면, 아니야. 완전히 틀렸어. 내 시간은 예외없이 흐를뿐더러 네가 이 글을 마주할 일은 어떤 방식으로도 없을 테니 걱정 마. 나에게 필요한 건 그저 나의 결심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 그러니까ㅡ반복되는 공허와 그리움을 몇몇 문장에 가두어 버릴 수 있는ㅡ 펜과 한 권의 노트뿐이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도 내 머릿속엔 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산처럼 무수히 쌓여있거든. 소설책 한 권으로 엮어도 분량이 부족할 일은 없을 정도야. 함께한 시간을 되새기는 일부터 진짜 너에게 묻고 싶은 질문들까지. 


뭐, 늘 그래 왔듯이 대부분은 뭔가를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세세하게 전달했던 시답잖은 이야기들이야. 하지만 이제 그 모든 사소함에는 이별을 고해야겠지. 어차피 허공으로 날아갈 것들이잖아. 네 주변에 안개처럼 흩어진 목소리 따위, 나는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거든. 


그 날 이후 나는 생각에 잠겨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생각만 하고 있어. 달착지근했던 사과 주스와 너에 대해, 시간에 대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부터 '내가 지금 무슨 상황에 처한 거지'까지, 온통 생각해야 할 것들 투성이었어. 그래, 그토록 모호한 말이라니. 차라리 네가 '관계의 끝'을 원한다고 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이 되었을지도 몰라. 미적지근한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널리 쓰이는 수많은 문장들 있잖아. 네가 원한 결과물이 그런 거였다면, 적어도 나는 너에게서 벗어나려는 의지라도 가지려 노력했을 거야. 메타도 분명 인정할 테지. 마음이 식어 떠날 사람이라면 그때를 한시라도 빠르게 앞당기는 게 서로를 위한 최선이라는 것. 시간과 감정을 아끼는 일이란, 생각보다 매우 현명한 판단을 필요로 하거든.


하지만 네가 한 말은 뭐랄까, 애정을 갈구하는 것 같기도, 이별을 요구하는 것 같기도 했어. 나는 네가 뱉은 그 몇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없었어. (물론 지금도 그래)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네 주변을 감싸던 그 쓸쓸한 여백을 해석할 시간이 나에겐 필요했어. 그날 밤, 나는 밤새 몽롱한 기분에 사로잡혀있다가 마치 바벨탑 이전에 인류가 사용하던 언어를 해석하는 언어학 연구자가 된 기분으로 아침을 맞았어.


오래도록 나를 괴롭히는 건 우습게도 가장 사랑스러웠던 순간의 너야. 우리가 함께 한 그 모든 순간에 네 마음은 뭘 하고 있었을지, 나를 비웃고 있었을지, 혹 혼란스러움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는지, 궁금한 건 온통 그런 것들 뿐이야. 엎치락뒤치락하는 한가닥 믿음과 구차함. 그 덜 떨어진 마음들이 내 시간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데도, 있잖아 메타. 나는 도무지 모르겠어. 솔직히 말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추측과 억측과 사실일지도 모를 그 어떤 일들을 상상하다가 해가 떠오를 즈음에야 겨우 잠이 드는 내 모습을, 네가 알아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야. 그래, 나도 알아. 이건 정말 최악이지.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날에는 자책감에 잔뜩 시달리다가 겨우 선잠에 들곤 하는데, 슬프게도 어둠 속에서 마주하는 건 기승전결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생동감만 가득한 악몽들 뿐이야. (오늘은 미쳐 날뛰는 거대한 가위에게 머리카락을 전부 뜯기는 꿈을 꿨어) 


물론 매 순간을 썩은 두부처럼 보내는 건 아니야. 이 달갑지 않은 거미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다 보니 다행스럽게도 기분이 나아지는 몇 가지를 발견했어. 특별한 묘약은 아니고, 침대에 누워서 허리가 뻣뻣해질 때까지 글을 쓰거나 서랍을 정리하고 창틀을 닦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이야. 시답잖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꽤나 도움이 돼. 손가락 발가락을 가만히 내버려둔 채 허공만 보던 시간에는 그런 모양새가 숨처럼 자연스럽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먼지를 닦고 문장을 정리하는 순간에는, 무엇이 숨처럼 자연스러운가, 에 대해 새롭게 고민하게 돼. 


아, 그리고 최근에는 다림질도 조금 하고 있어. 구겨진 옷 주름이 한 바닥 사라지면 먼지쌓인 내 기분도 조금 환기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생각난 김에 겨울옷들 좀 꺼내야겠다. 빳빳한 니트는 오래 걸어두어도 접힌 자국이 쉽게 지워지지 않더라고. 




글. 지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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