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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08. 2019

실연당한 여인답게

진공 상태 2부

실연당한 여인답게


진진이 찾아왔어. 인터폰이라는 건 장식품으로 걸어둔 게 아닌데 말이야. 온 동네에 시위라도 하는 건지, 매번 저렇게 쾅쾅쾅쾅쾅, 하고 다섯 번이나 문을 두드리는 거야. 아직 부서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야.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지잉, 열리자마자 화난 곰처럼 잔뜩 소리를 지르는데 (“전화는 왜 안 받는데, 메시지는 왜 안 보는데”)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나는 장판이라도 뜯어먹은 강아지처럼 완전히 기가 죽었어. 내 방 귀퉁이에 있는 누더기 소파 있잖아, 진진이 그 등받이 틈새에서 핸드폰도 찾아냈어. 전생에 무한 동력 확성기였는지 그 쉴 새 없는 잔소리에 완전히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니까. 


진진은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내 모습이 훨씬 건강하고 좋아 보인다며 실망스러워하더라. 연락도 없이 열흘이 넘게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정도면, 더 실연당한 여인답게 짙고 암울한 분위기를 풍겨야 한다는 거야. 이렇게 실망할 줄 알았으면 눈밑에 뭐라도 좀 칠해볼 걸. 


결론적으로 나는 진진의 예고 없는 방문으로 인해 상당한 피로가 누적됐어. 내가 분명 '나는 네가 상상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진진. 인생을 몽땅 걸었던 사랑을 잃어버리고,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해서 침대에 코를 박고 하루 종일 우는 여자를 연기해 줄 순 있지만, 우리 사이에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네'라고 말했는데도 진진은 내 침대 왼쪽 모서리를 짓뭉개던 네 시간 동안 끊임없이 나를 비운의 여주인공인 듯 대했어. 내가 깎아준 사과를 전부 집어먹고는 잘린 껍질을 핥아대면서 말이야. '나는 네가 이 시간을 통해 뭔가를 배우게 될 거라고 생각해 쩝쩝' '네 마음의 상처가 좀 아물면 내가 다니는 테니스 동호회에 한 번 나와보면 좋겠는데 쩝쩝' 하는 말들을, 나는 서너 번이나 반복해서 들어야 했어. 


그래 물론 너도 알다시피 진진은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야. 나도 그 부분은 인정해. '네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여자잖아'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니까. 하지만 어, 정말 오늘만은 진진을 밧줄로 칭칭 감아서 창문 밖으로 사뿐히 내려보내고 싶었어.




글. 지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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