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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17. 2019

낯선 여자의 미소를 인생의 낙으로 삼는 남자

프리지아와 크레이프 케이크 9부


문 틈으로 흘러들어오는 푸른 공기. 창문에 맞닿은 햇살도 꽤나 따스해. 내 방에는 은은한 헤이즐넛 향기와 달콤한 타르트 냄새가 가득하고, 세상은 사랑을 하기에 완벽한 하루를 누군가에게 선물해 주는 중이지. 덕분에 나는 행복이 가득 담긴 연인의 웃음소리까지 곁들여 들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어. 


아빠 말이야. 왜 자꾸만 여자들을 집으로 들이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이런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며칠 안에 끝장나는 트라우마라도 있나봐. 물론 중년의 사랑을 타박하려는 마음 따위는 전혀 없지만 (오히려 격려해주고 싶을 정도지만) 나이를 떠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상식이라는 게 있잖아. 오십 여섯 아저씨를 앉혀두고 ‘사랑이란 말이죠, 시간을 들여 오랫동안 서로를 알아가고 정성을 쏟아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일회용 종이컵 갈아치우듯 하시면 안 돼요’ 따위의 연애학개론을 펼칠 수도 없고 말이야. 


자꾸 꿍얼거리고 싶진 않은데 오늘은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어.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도 완벽하게 대수로운 날, 눈에 띄는 거라면 뭐라도 붙들고 트집을 잡아야 하는 날이야. ‘이젠 잊어버려야지. 그럴 때도 되었어’ 아무리 되뇌어도 생각은 마음과는 별개의 공간을 쓰는지 눈곱만큼도 말을 듣지 않아.


오늘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이야. 이제는 한 오라기의 의미도 없는 숫자인데 여전히 이렇게 질척거리는 게 우습지 뭐. 한 때는 방문 너머로 들리는 웃음소리에 이유 없이 포근하던 시절도 있었거든. 그렇게 찰나의 순간인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깊이 담아둘 걸 그랬어. 왜 그런 거 있잖아. 행복했던 순간들을 깊이 잘 간직해 두었다가 기댈 곳이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위로받는 거.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추억은 줄어들지 않고 위로는 마르지 않는 거지.


있잖아, 가끔은 엄마가 떠난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불행한 엄마를 곁에서 두고 보는 일은 분명, 떠나간 엄마를 그리워하는 일보다 더 서러울 테니까. 엄마는 그저 한 여자로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섰을 뿐인 거야. 한때는 이기적이라고도 생각했지만 이제 와선 어느 정도 이해가 돼. 생각해 봐. 낯선 여자의 미소를 인생의 낙으로 삼는 남자. 너도 사랑하지만 쟤도 사랑하니 마음 넓은 네가 좀 이해해 주면 안 될까, 하고 말하는 연인. 팔 년 오 개월을 함께 산 여자가 떠나는 순간, 사람 좋은 미소로 굿바이 인사를 건네는 남편.


뭐, 어쨌든. 그나마 다행인 건 저 신물 나는 웃음소리도 이제 곧 끝이라는 거야.




글. 지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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