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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28. 2019

커다란 중고책과 장미 한 송이

프리지아와 크레이프 케이크 14화


‘새로운 동네에는 편의시설이 별로 없으니, 필요한 것들은 미리 사놓는 게 좋을 거야.’ 진진의 말에 응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막상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려니까 뭘 사야 하는 건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아. 사실은 감이 오지 않는 게 정상인 거야. 세상의 이치잖아. 필요한 걸 준비해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시작해보니 필요한 게 뭔지 알겠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옳은 순서란 말이지. 아, 왜 진진에게 저 말을 들은 순간엔 이런 기가 막힌 대답이 떠오르질 않았을까. 꼭 이렇게 한 박자 늦은 생각을 하곤 혼자 아쉬워한다니까. 


툴툴거리며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꽃집 앞에 도착해 버렸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다육식물을 위한 참고서 같은 것을 추천해줄 수 있느냐 물었더니, 여주인의 남편이 ‘아아 제인, 칸테는 잘 있나요’ 하고 엉뚱한 대답을 하며 까딱까딱 손짓을 했어. 


꽃집 가장 안 쪽에는 뒷마당으로 연결되는 작은 쪽문이 있어. 간혹 꽃집이 텅 비어, 제인이에요- 하고 소리를 치면, 쪽문 너머로 여주인의 목소리가 들리곤 했어. 무어라 대답을 해도 웅얼웅얼하는 소리로 들려 전혀 알아듣질 못했지. 


쪽문을 열고 등장한 여주인은 색색의 장미를 한 아름 품고 있었어. ‘사실은 제인에게 주고 싶은 책이 있거든요. 중고지만 이사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줘요’ 다정한 신혼부부는 ‘쉽게 친해지는 다육 식물’이라는 제목의 모서리가 살짝 말린 책과 대를 짧게 자른 장미 한 송이를 내밀었어. 커다란 중고책과 장미 한 송이를 들고 평일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는 여자라니, 뭔가 소설 속에나 등장할 법한 모습이라 웃음이 났어. 


역 근처에 있는 생활용품점에 들러 휴지걸이 하나와 수저 젓가락 세트 하나, 화장실용 슬리퍼도 하나 샀어. 새 집 거실처럼 꾸며진 매장의 인테리어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이것도 저것도 전부 필요한 듯, 전부 쓸모없는 듯도 해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 가게를 나와버렸어. 뭐, 필요한 건 나중에 진진에게 부탁해도 될 테니 상관없겠지. 


드디어 이 곳에서의 마지막 오후야. 시원섭섭하다는 게 꼭 이런 기분일까. 날도 날이니만큼, 오늘은 카레라도 좀 만들어볼까 해. 아빠가 집에 오면 ‘아니, 제인이 요리를’ 하며 놀라 기절할지도 모르겠어. 안 하던 짓을 할 때는 언제나 알 수 없는 결과가 따라붙기 마련이지만, 눈물 젖은 카레를 먹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네. 




글. 지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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