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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24. 2019

시간이 흐르면 그리워지는 아주 사소한 것들

프리지아와 크레이프 케이크 13화


‘함께 할 준비라는 게 따로 있을까. 어느 정도의 준비는 필요할지 몰라도, 기준이라는 게 생겨버리면 그때부터 좀 곤란해지는 거 아닐까 싶은데’ 

찐득한 초코 브라우니를 포크로 콕콕 자르며 메타가 말을 이었어. 

‘이렇게 하자. 두 번의 겨울이 더 지날 즈음, 지난번에 다녀온 남쪽 바다 앞으로 가자. 내 주머니 속 반지 따위, 너는 눈곱만큼도 모른다는 듯이 함께 바다를 걸어줘. 그럼 하나도 긴장하지 않은 척하며 내가 말할게. 우리가 함께할 날들에 대해서. 함께 그릇을 씻고 야채를 다듬을 순간부터, 서로의 시간을 자랑스러워할 먼 미래까지.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예언인 거야. 이 예언을 기점으로 우리는 함께할 기준에 OK를 받는 거지’


눈을 뜨니 8시 40분. 불을 켜고 잠이 들었는지 형광등이니 창 밖의 햇살이니 하는 것들이 잔뜩 쏟아져, 백색 도시에 덩그러니 버려진 고아 같은 기분이 들었어. 


이렇게나 생생한 꿈은 정말 오랜만이야. 포크를 잡는 메타의 이상한 손 모양, 테이블 옆 창가에 나란히 놓인 붉은 메트로시카까지. 사진으로 찍어놓은 듯 아무것도 변함이 없어. 그 모호한 경계가 묘하게 안락해, 나는 다시 침대에 털썩 누워버리고 말았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감아봤지만, 꿈처럼 따라오는 건 혀 끝에 느껴지는 텁텁한 브라우니 맛뿐이야. 잠은 전부 달아났어. 


이를 닦고,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에 미스트를 잔뜩 뿌리고는 옷을 챙겨 입었어. 계단을 내려가니 출근을 준비하는 아빠가 구두끈을 조이며 말을 걸었어. ‘일어났니 제인, 오늘 저녁은 아빠랑 같이 먹는 거 어떠니’ 하며. ‘응, 알겠어요’ 가벼운 대꾸를 하고 집을 나섰어. 


사람들이 잔뜩 붐비는 버스 정류장 너머로 커브를 돌아 마주하는 건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고양이 한 마리야. 주차된 오토바이 뒤편으로 빼꼼하게 고개를 내민 꼬질꼬질하고 사랑스러운 얼굴.


한참을 걸어 도착한 카페는, 여전히 컨테이너 박스를 꼭 닮았어. 그 무심한 모양이 마음에 들었는데, 겨울이 되니 역시 잿빛 벽은 조금 쌀쌀맞은 기분이네. CLOSE 팻말이 걸린 유리문 너머로 분주하게 오픈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보였어. 커피 머신의 전원을 올리고 그날 분의 케이크와 브라우니를 진열하고 탁상 메뉴판의 위치를 조금 이 쪽으로, 조금 저 쪽으로 옮기는 모습들. 시선을 돌리니 창 밖에서 곧장 보이는 테이블도, 키가 다른 메트로시카들도 그대로야.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 싶어 가게 안으로 슬쩍 고개를 내미니, ‘네에 들어오셔도 돼요’ 하며 한 남자가 뛰어나와 팻말을 뒤집어 걸었어. 나는 오늘의 커피 한 잔과 브라우니 하나를 주문했어. 곰곰이 생각하다가 ‘두 개는 따로 포장해 주세요.’ 하는 말도 덧붙였어. 떠나기 직전까지 잔뜩 먹어둘 심산이야. 시간이 흐르면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전부 그리워질 테니까. 


익숙한 테이블에 앉아 주문한 메뉴를 기다리는데, 삐딱한 마트로시카들이 눈에 들어왔어. 아이보리 컬러의 커튼, 붉은 마트로시카,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인조 화분. 꿈속으로 다시 들어온 것만 같았어. 아니, 조금 다른 것도 같았지만 무슨 상관이겠어. 어차피 메타는 여기에 없는 걸. 




글. 지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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