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가기 전 스포츠용품점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했다. 정식 알바생은 아니었고 친구 대신 보름 정도 대타로 뛰었다. 대타를 부탁한 친구가 말했다.
“여자친구랑 놀이동산에 갔다가 다리를 다쳤거든. 잠시 땜빵해 줄 사람이 필요해.”
설문지 알바할 때 알게 된 그리 가깝지 않은 친구였는데 왜 내게 그런 부탁을 하는 건지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친구가 덧붙인 ‘너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라는 말에 혹하고 말았다. 남자는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고 했다. 날 믿음직스럽게 바라보는 친구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판매직은 해보고 싶었던 일이기도 했다.
며칠 후 가게로 출근했다. 손님에게 용품을 팔진 못했다. 내게 주어진 일은 창고정리였다. 도매를 겸하는 곳이었기에 창고에 사람이 필요했다. 게다가 알바를 시작한 이튿날, 가게 이전이 있었다. 옮겨야 할 그 많은 짐들, 창고의 박스들, 입에서 단내가 났다. 거의 3~4일간은 막노동에 버금가는 업무를 소화해야 했다.
사장은 30대 후반의 남자였다.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꼬장꼬장했고 요만한 거 하나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일을 대할 때의 꼼꼼한 자세는 훌륭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업무 스타일이 촘촘하다기보다는 성격 자체가 쪼잔한 사람이었다.
특히 점심시간 때 그의 쫀쫀한 성격이 제대로 드러났다. 가게에는 오전 조 알바 누나와 오후 조 알바 누나가 있었다(누나라고 부르긴 했으나 이모뻘쯤 되는 아줌마들이었다). 점심은 주로 오전 조 누나랑 먹었다. 인근 한식집에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또는 생선찌개를 배달시켰다. 사장은 점심시간이 되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곤 했다. 처음엔 ‘따로 드시려나?’ 싶어서 찌개를 2인분만 배달시켰다. 그런데 주문을 한 뒤 몇 분 지나면 사장이 슬그머니 가게로 돌아왔다.
“밥은 시켰어?”
“네, 생선찌개 2인분요. 근데 사장님은 안 드세요?”
“나야 뭐... 이따가 약속이 있어서.”
“그러시군요.”
“야, 그러면 말 나온 김에....”
“?“
“식당에 전화해서 공깃밥 하나만 추가로 달라고 해.”
“네?”
“나도 점심 거르고 나가기가 좀 뭐해서 그래. 간단하게 한술 뜨고 나가려고.”
“아...네...”
이런 식이었다. 물론 찌개 2인분에 공깃밥 추가해서 세 명이 먹는 건 별로 이상한 광경이 아니다. 하지만 사장이 종업원의 식사에 밥숟가락을 얹는 것이라면? 그것이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일어난다면? 정말 혼자 보기도 창피한 풍경이었다. 사실 점심 식대는 따로 받기로 약속돼 있었다. 그러니 사장은 우리의 점심값을 삥뜯어 자신의 끼니를 해결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런 사람이 알바비는 제대로 줄 것인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시간 내서 친구를 찾아갔다. 그런데 이 녀석, 멀쩡하다.
“며칠 쉬니까 나아졌어.”
친구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아프긴 했던 것일까. 걷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어쨌든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사장이 엄청나게 쪼잔한 인간이다. 어떻게 찌개 2인분 시킬 때마다 공깃밥 추가로 꼽사리를 낄 수 있느냐, 첫인상부터 재수 없더니 계속 재수 없다, 알바비를 못 받을 수도 있겠다, 돈 떼이면 노동부에 신고해야 하는데 방법을 잘 모르겠다 등등. 사장의 뒷담화를 듣던 친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만해라. 우리 삼촌이야.”
순간 나는 당황했다. 이후 수습하려 뭐라뭐라 변명을 늘어놓았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다음날, 나는 여느 때처럼 출근해 창고를 정리했다. 한 시간쯤 뒤 사장이 날 불렀다. 그러곤 뭐 씹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넌 오늘까지만 일해. 다음 주부터 조카가 나오니까.”
그렇게 순식간에 잘렸다. 마지막 점심으로 된장찌개를 시켰다. 그날은 사장이 함께 점심을 먹지 않았다. 모처럼 편하게 식사하며 알바 누나와 대화를 나눴다. 중간쯤 친구 얘기가 나왔다. 가게 이전을 앞두고 ‘이삿짐 나르기 싫다’며 삼촌이랑 승강이가 있었다고 했다. 이삿짐 나르고 정리해야 하는 힘든 기간에만 내게 알바일을 토스한 듯했다. ‘너라면 믿을만해서’라는 입에 발린 칭찬을 날리며....
오후에 사장이 현금으로 알바비를 줬다. 약간의 오차는 있었지만 예상 금액과 큰 차이는 없었다. 노동부 운운한 것이 효과를 발휘한 건지도 모르겠다.
퇴근 무렵 가게로 전화가 왔다. 친구였다. 여자친구랑 있는데 같이 맥주나 하자고 했다. 퇴근 후 친구가 있는 호프집으로 향했다. 맥주와 치킨을 시켰다. 골뱅이와 쥐포도 추가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알고 있던 유머시리즈를 풀어 놓았다. 친구의 여자친구가 침을 튀기며 웃어댔다. 방정맞기 이를 데 없었지만 내 여자가 아니니 상관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친구에게 말했다. 어제 네 삼촌 욕해서 미안하다고, 아르바이트 자리 소개해 줘서 고마웠다고.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그렇게 미안하고 고마우면 오늘 니가 사.”
그래서 계산했다. 알바비 중 상당액이 그렇게 날아갔다. 집에 와서 이불을 펴고 누웠다. 잠이 오질 않았다. 대체 뭐가 미안하고 뭐가 고맙다는 건지.... 그랬다. 그때의 나는 얼뜨기였다.
몇 달 후 나는 군대에 갔다. 이후에도 그 얄밉던 친구 생각은 별로 나지 않았다. 하지만 공깃밥 추가로 내 점심을 뺏어 먹던 사장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그는 부자가 됐을까. 알 수 없다. 적어도 가난하게 살 것 같진 않다.(끝)
<그동안 끼니를 소재로 다양한 에피소드를 연재하였습니다. 그러다 출판사와 연이 닿아 2022년 8~9월 중 출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출판사와의 협의에 의해 그간 연재했던 끼니 에피소드 대부분을 비공개로 전환합니다. 이점 구독자님들께 양해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