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랐던 소리를 알아차리는 즐거움
8살 아들은 낙엽 밝기를 좋아한다. 먹성이 좋은 탓인지 과자 소리가 난다고, 그림일기에 적기도 했다. 본격적인 코로나 시대가 열릴 때 초딩 생활을 시작해 생활의 제약이 많았지만, 그 덕에 엄마로서 올 한 해는 아이를 관찰하는 시간이 많았던 날들이었다.
학교까지 5분 걸음이면 충분한데, 아이들은 15분, 20분이 걸린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위층 형아, 아래층 친구, 옆 동 친구 삼삼오오 모이면 인사 나누느라 잠시 정지. 거기다 약속 잡느라 바쁘다. “오늘 마치고 브롤 만날래?”, “우리 집에 올래?” 등의 약속을 나누느라 잠시 정지. 겨우 발걸음을 떼게 만들었지만 지렁이 앞에서 또 일시 정지. 지렁이를 누군가 발견하면 모두 모여 땅을 쳐다보며 약속이라도 한 듯 ‘우와’를 연신 외치고서야 다시 학교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다.
가끔은 “얘들아, 늦었어, 지각이야. 얼른 가자.”라고 서두르는 내가 바람직한가 고민하기도 한다. 인생에 지각할 일 많은데 이 정도 지각이야, 지렁이 좀 볼 수 있지 뭐. 하고 말이다. 그 길에 아이는 단지 한쪽으로 쓸려진 낙엽들을 밟아 대며 걸어야 성이 차는 모양이다. 간당간당하게 학교 정문을 통과한다. 들어가면서도 실내화 주머니를 하늘로 던졌다 받기를 하며 간다. 맥락 없는 등굣길.
11월에는 다시 여유가 생기면서 아이와 산책이나 라이딩을 하러 자주 나갔다. 자전거로 낙엽을 밟을 줄 아는 아들은 제법 이제 자전거를 즐긴다. 호흡 불규칙한 엄마를 기다려 줄 줄도 알고. 기특하다. 코로나 때문에 야외 활동을 많이 하게 되면서 산으로 갈 때도 있었는데.
이번 가을, 한창 도토리가 산길에 가득할 때였다. 산에 자주 오르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도토리도 나무마다 종류가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다. 어떤 건 길쭉하게 생겼고, 어떤 건 짜리 몽당 하면서 통통하다. 어떤 건 짙은 밤색을 띄지만 어떤 건 금발색을 떠올리게 한다.
"에너지가 부족해 엄마"라고 에너지타령을 하는 아들 녀석과 바위에 앉아서 목을 축이고 싸온 과일을 먹다 보면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말이 없다. 잠시 말이 없는 그 시간이 좋은 이유는 아들도 나도 소리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몇 초만 기다리다 보면 도토리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바람이 나무들을 쓰다듬고 지나가면 툭, 투둑. 그리고 다음 바람이 지나가면 이번엔 저기서 툭, 투둑, 데구르르. 앞구르기를 하는 도토리 낙하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아름답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아들과 함께 공유해서 더 값진 시간이었다.
세종으로 이사 오고 난 뒤 가을이면 밤과 도토리를 참 많이 보게 된다. 산길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밤은 제사음식 차릴 때나 보던 것이라 생각했다. 분주한 엄마 옆에서 할 일 없는 아버지가 동물의 왕국을 보시면서 밤을 까던 것 정도로 기억하고. 도토리는 무침으로 상에 나오던 것만 보던 기억밖에 없는데. 이제는 그 소리도 듣고 아이와 도토리 찾아보는 놀이도 하게 됐다니.
같은 학교 등굣길을, 같은 코스의 산길을 가지만 느끼는 매일이 다르다. 햇살이 다르고, 바람의 결이 다르고, 낙엽 뒹구는 소리, 도토리 떨어지던 그 소리도 저마다 달랐다. 사실 같은 일상의 반복이 지루하다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그 지루함을 참지 못해 뭐든 해야 된다 강박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런 자신을 깨닫고 스스로에게 관대해지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빛의 화가 모네. 그의 그림은 따뜻해서 좋다. 인생의 그늘이 많다 생각될 때, 한 번씩 보는 모네의 그림을 보다가 그가 매일 수련 작품을 그려낸 것도, 새롭게 매일 볼 줄 아는 눈을 가졌기 때문이었겠다, 생각한다. 행복은 일상의 기쁨을 찾아내는 것, 발견하는 일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