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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경 Jun 21. 2021

'보고싶다는 거였어.'

그리움으로 붉게 익은 과일

토마토를 잘 먹고 싶다. 여기서 ‘잘’이란,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쁘게’ 라는 의미의 ‘잘’이다. 토마토는 통째로 먹어야 제 맛인데 그래서 예쁘게 먹으려면 한 입 베어 먹을 때마다 신경을 꽤 써야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엄마는 우리에게 토마토를 먹이기 위해서 일 나가기 전에 손수 친절하게 네 등분으로, 그것도 안 먹을까봐 여덟 등분으로 잘게, 잘게 조각내어 접시에 두고 출근한 적이 많았다. 그런 수고로움에도 손이 잘 가지 않았던 과일. 설탕을 뿌려 주면 그나마 설탕 부분만 살살 혀로 핥아 먹고 나뒀던 어린 시절도 떠오른다. 나이가 들고서는 건강 챙기려고 가끔씩 먹다 보니 지금은 꽤 생각나는 맛이 되었다. 하지만 먹게 되더라도 한 손에 들고 통째로 먹는다. 그래야 제철과일을 내가 제대로 맛있게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각난 토마토는 싫어한다. 무엇보다 칼로 베인 토마토를 한 입 먹으면 입 안에서는 속살을 베고 지나간 그 칼날의 맛이 났다. 베인 맛이 나는 토마토를 우물거리면 약간의 불쾌한 감정도 함께 먹는 기분이 들어 편치 않았다. 칼에 베이고 난 토마토는 마치 영혼이 사라진 과일을 마주하는 기분이 드니까. 


암튼, 나는 통째로 베어 먹는 토마토를, 먹을 때마다 ‘잘’ 먹어 보고 싶다. 한 입 베어 먹으면 토마토의 육즙이 줄줄 흐르고, 잘못 베어 먹으면 육즙이 사방팔방으로 발사될 수 있어서 긴장하며 한 입, 한 입 조심스레 물어야 한다. 


수분 많은 과일이다 보니 토마토를 들고 먹을 때는 손가락을 타고 물기가 흐르기 때문에 토마토를 쥔 손가락 중 새끼 손가락은 펼친 채로 물기를 털며 먹게 된다. 한마디로, 성가신 과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미를 맛보고 싶은 마음에 종종 생각이 난다. 바야흐로 토마토의 계절, 여름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토마토 예찬 같지만, 사실 그렇게 토마토를 즐겨 먹는 편은 아닌데, 근래 다시 토마토 생각을 했던 일이 있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모녀 지간으로 나오는 배우 문소리와 김태리가 한여름 토마토밭 평상에서 나누는 대화를 보면서였다. 


둘은 그늘에서 토마토를 한 입씩 베어 물며 이야기를 나눈다. 돌아가신 아빠가 보고 싶을 때 없냐는 물음에 혜원(김태리)의 엄마는 다만 다 먹은 토마토 꼭지 부분을 힘껏 밭으로 던진다. 


(영화 <리틀포레스트> 중에서)  


“저렇게 던져 놔도 내년엔 토마토가 열리더라. 신기해.” 


엄마가 던져 놓은 그 자리에 붉게 다시 자라나 있는 토마토를 베어 먹으며 혜원은 그 대답을 이해한다. 


‘보고 싶다는 거였어.’ 


보고 싶은 마음은 해마다 여름이면 새빨갛게 익은 토마토가 되어 자란다. 그리움을 표현한 그 장면이 인상적이어서 이제 토마토만 보면 자연스레 ‘보고 싶은 마음으로 붉게 익은 과일’이라는, 나만의 작은 정의 하나가 함께 연상된다. 그리고 그렇게 연상되는 순간이 좋다. 


시장에 가니 붉은 토마토들이 광이 나는 얼굴을 하고 웃으며 여기 저기 벌써 명당에 자리 잡고 앉아들 있다. 그리운 마음, 물컹, 한 입 베어 물고 올해 여름을 보내야지. 그 모습이 예쁘지 않아도 괜찮은 계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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