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츠와(KUTSUWA) 4분할 종이 커터
언제였는지 어렴풋이도 기억나지 않지만, SNS 알고리즘을 통해 처음 접한 뒤로 “한국엔 언제 들어오려나?” 하고 출시를 기다렸던 상품이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다들 명품 지갑이나 가방을 떠올리겠지만, 오늘을 기준으로 7,479원, 일본 돈으로 800엔에 살 수 있는 흔한 문구였다.
문구를 좋아하긴 하지만, 800엔짜리를 문구 하나를 직구하기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기도 하고 ‘이 정도로 신박한 제품이라면 곧 한국에서도 보게 되겠지’라는 확신에 소비욕구를 꾸역꾸역 붙잡았다. 그리고 나의 확신은 꼭 맞았다. 업무로 정신없던 와중에, 내면의 평화를 찾기 위해 방문한 온라인 문구 편집숍에서 그 제품을 딱 마주했고, 나의 손은 이미 결제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제품이 뭐냐고? 일본 문구회사의 공식 사이트에는 ‘ヨンブンカッツ’, 한국의 문구 편집숍에는 ‘4분할 종이 커터’라 명명된 문구다. 제품명만 보면 재단기에 가깝지만 여기에 한 가지 기능이 더 있는데, 잘라낸 종이를 메모지로 쓸 수 있는, 작은 클립보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더 세부적으로 말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A4 크기의 이면지를 칼과 가위 같은 절단 도구 없이 종이에 자를 대고 손으로 찢던 방식으로 잘라내어 A6 사이즈 메모지 4장을 만들 수 있는 제품이다. 문구와 기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좋은 물건이 있을까. 게다가 이면지를 다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친환경적이기까지 하다.
추석 연휴의 물류 폭주 속에서도 무사히 도착한 택배 박스를 열었고, 제품을 실제로 써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A6 사이즈라 휴대성은 물론이고, 메모하기에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칼이나 가위로 자르는 게 아니라 단면이 일정하지 않다는 정도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삐뚤빼뚤, 오돌토돌한 이 부분에서 왠지 정겨운 사람 냄새가 났다. 만족감에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나 보다.
신나서 메모지를 잔뜩 만들어가던 중에, 일본 문구회사를 방문했던 기록 탓인지 유튜브 알고리즘은 나를 일본 가수 ‘타케나카 유다이(竹中雄大)’의 ‘Pretender’ 앞으로 이끌었다. 일본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분명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이별 노래였다. 몇 번 동안은 가수의 성량과 음색에 집중하다 이후엔 재생 버튼을 처음으로 되돌려, 영상에 입혀진 가사의 해석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グッバイ
(Goodbye)
君の運命のヒトは僕じゃない
(너의 운명의 사람은 내가 아냐)
辛いけど否めない
(괴롭지만 부정할 수 없어)
でも離れ難いのさ
(그래도 널 쉽게 놓을 수가 없어)
その髪に触れただけで
(그저 내 머릿결에 손이 닿았을 뿐인데)
痛いやいやでも
(아파, 싫은데도)
甘いな いやいや
(달콤해 안 돼, 안 돼)
グッバイ
(Goodbye)
それじゃ僕にとって君は何?
(그럼 너는 내게 어떤 존재였을까?)
答えは分からない
(답은 잘 모르겠어)
分かりたくもないのさ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아)
たったひとつ確かなことがあるとするのならば
(단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君は綺麗だ
(넌 정말 아름다워)
‘Pretender’를 들으며 종이를 자르다 보니, 뾰족한 각에 의해 갈라져 나가는 종이들이 문득 슬퍼 보였다. ‘각’은 면과 면이 만나 이루어지는 모서리라고 사전에서는 정의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각을 세운다’는 표현으로 쓰는 그 말. 서로의 둥근 면이 닿아 있던 시절이 지나 날카로운 각이 세워지는 순간, 관계는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한다. 이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에 구매한 문구를 바라보며 위안이 되는 건, 잘라낸 종이가 커터 칼로 깔끔하게 베어낸 종이처럼 손이 베일만큼의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울퉁불퉁하고 매끄럽지 않은 단면이 오히려 인간적이고, 그래서 다시 조각을 맞춰볼 때 더 쉽게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