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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원 Mar 23. 2024

‘만년필’로 습득한 연애의 기술

근데 쓸데가 없네

갑작스레 잡혀버린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책상 한편에서 잠자고 있던 만년필 한 자루를 잽싸게 낚아채서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 도중에 참석한 탓에 자리에 앉마 자자 시선은 스크린에 두고 손은 바쁘게 필기를 해나가며 회의를 흐름을 추격하고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잘못됨을 알아차려 버렸다. 회의의 주요 내용들이 종이에 쓰여지고 있는 줄 알았지만 만년필의 뾰족한 ‘촉’ 부분이 종이를 긁듯 스쳐 지나간 흔적만 보일 뿐, 있어야 할 검은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만년필에 잉크가 없다.

물 건너온 새 만년필을 길들이느라, 한동안 이 녀석을 사용하지 못했던 탓에 잉크의 흐름이 가뭄을 맞이한 논 바닥처럼 바싹바싹 말라버렸다. 만년필이 생소한 사람들은 잘 이해되지 않겠지만, 만년필은 그런 존재다. 한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잉크가 서서히  말라버린다. 만년필계에선 이를 ‘닙 마름’ 또는 ‘잉크 마름’이라고 표현하며 한동안 잉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황을 ‘헛발질’이라 일컫는다.


잉크가 당장은 나오지 않더라도 조금만 기다리면 금세 잉크를 뿜어내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잉크가 나오지 않는다면, 귀찮은 세척을 시작하여야 하는 순간을 마주하거나 영영 이별을 하여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다행히도 이날엔 1~2분 정도가 지나자 다시금 검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애도 만년필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한동안 관심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이내 나에게서 돌아서버린다. 물론 돌아서버린 것에 대한 책임은 관심을 주지 못한 오롯이 나에게 있을 뿐이다.


상대는 언제나 자신을 봐주기를 기대하다,
서서히 메말라가고 결국엔
서로의 마음에 긁힘을 남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만년필이 왜 만년필인가? 변하지 않는 관심과 애정만 충분하다면 오랜 시간 또는 평생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잉크가 마르지 않는 만년필 같은 그런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손을 맞잡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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